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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세계가 공범이다

입력
2017.07.19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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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시민들이 13일 간암으로 사망한 중국 인권운동가 류사오보의 대형 초상화를 들고 추모 시위를 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홍콩 시민들이 13일 간암으로 사망한 중국 인권운동가 류사오보의 대형 초상화를 들고 추모 시위를 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G7, G8, G20…. 숫자 앞에 붙은 이니셜 ‘G(Group)’는 힘을 뜻한다. ‘주요 ○○개국’으로 번역되는 호칭에서 보듯 글로벌 이슈를 다루는 파워 협의체들이다. 당연히 회의에서 논의되고 합의된 사안은 국제질서를 뒤흔들 만한 파급력을 지닌다. 원래 금융위기 등 세계 경제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런 협의체는 각국 수장이 참여하는 정상급 만남이 자리잡으면서 안보와 평화, 인권 등 다양한 주제로 영역을 넓혔다.

원조 ‘선진국 클럽’인 G7은 몇 해 전부터 북한의 열악한 인권 상황을 개선하라는 요구를 공동성명에 빠뜨리지 않고 넣는다. 2011년 러시아를 더한 G8에서는 시리아와 리비아 독재정권의 인권 탄압을 문제 삼았다. 힘있는 나라들의 친목모임도 인권의 대변자가 될 수 있음을 입증한 듯 보였다. 그런 줄 알았다.

오랜 위선은 이달 7,8일 열린 독일 함부르크 G20 정상회의에서 발가벗겨졌다. 닷 새 뒤 류샤오보(劉曉波)가 숨졌다. 1989년 톈안먼(天安門) 시위를 계기로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인권운동가, 30년 가까이 조국을 떠나지 않고 국가폭력에 저항한 중국의 양심이다. 국제사회는 2010년 그를 감옥에 갇힌 세계 유일의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만들어 중국 정부의 반인권 행태를 역으로 고발했다.

죽음은 이미 눈 앞에 있었다. 말기 암환자 류샤오보는 “외국에서 치료를 받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살려는 몸부림이 아니라 자신이 떠난 뒤 창살 없는 감옥에 홀로 남겨질 아내를 위한 마지막 배려였다. 시진핑(習近平) 정부는 냉혹했다. 출국은커녕 시신조차 사망 이틀 만에 불태워 육신의 흔적을 말끔히 지웠다.

G20은 기회였다. 쏟아지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시 주석을 면전에서 압박할 이만한 무대는 없었다. 하지만 그 많은 양자회담과 정상회의가 치러진 이틀 동안 누구도 류샤오보의 이름을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줄곧 날을 세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마저 시 주석 앞에서는 꿀먹은 벙어리가 됐다. 두 사람은 판다와 축구 얘기로 시간을 보냈다.

10년 전만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1996년 중국의 부실한 에이즈 관리 실태를 폭로했다가 가택연금을 당한 여성 의사 가오야오제(高耀潔)는 중국 지도부에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한 서방의 노력으로 2007년 풀려났다. 반체제 인사인 천체물리학자 팡리즈(方勵之), 정치범 웨이징성(魏京生)도 비슷한 경로를 밟았다.

중국은 돈으로 침묵을 샀다. 그 사이 무시무시한 경제력을 등에 업은 덕분이다. 국제사회의 눈치보기는 아마 금력을 동원한 중국의 ‘갑질’을 여러 차례 봐왔기 때문일 것이다. 류샤오보에게 상을 준 노벨위원회 본부가 자국에 있다는 이유 만으로 최대 연어수출국인 중국 시장을 잃은 노르웨이는 지난해 말에야 겨우 상대의 심기를 누그러뜨렸다. 이들은 독불장군 트럼프에 맞서려면 중국을 끌어들여야 해 침묵은 필요악이라고 항변하기도 한다.

그래도 말했어야 했다. 인권은 보편적ㆍ절대적 가치임을 G20 국가들이 모를 리 없다. 1948년 채택된 유엔 세계인권선언문 서문은 “가입국은 자신의 인민들과 자국 통치 하에 있는 인민에게도 이들의 권리와 자유의 존중을 교육을 통해 촉진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인권은 응당 국가가 지켜줘야 할 절대선이라는 얘기다. 중국도 물론 유엔 가입국이다. 선언문 22조는 “모든 사람은 국제적 협력에 의해 존엄과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에 불가결한 권리 실현을 요구할 수 있다”며 인권수호가 국제사회의 책무임도 알렸다. “해외치료 요구는 내정 간섭”이라는 중국 정부의 주장은 그래서 틀렸다.

지금도 무수한 제2의 류샤오보들이 통제 사회에서 신음하고 있다. 류샤오보는 비로소 자유를 얻었지만 강대국들은 인권을 말할 자격을 잃었다. 세계가 그의 죽음을 방조한 공범이다.

김이삭 국제부 기자 hir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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