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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원하는 건 아름다운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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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원하는 건 아름다운 거짓말"

입력
2016.04.22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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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과 일탈로 세계에 맞서는 반영웅 헨리 치나스키를 창조해낸 작가 찰스 부코스키. 열린책들 제공
반항과 일탈로 세계에 맞서는 반영웅 헨리 치나스키를 창조해낸 작가 찰스 부코스키. 열린책들 제공

호밀빵 햄 샌드위치

찰스 부코스키 지음·박현주 옮김

열린책들 발행·424쪽·1만3,800원

“아버지는 나를 그 부자 고등학교에 보내면서, 내가 그 아이들이 크림색 쿠페를 타고 질주하면서 환한 원피스를 입은 여자들을 꼬시는 모습을 보며 지배자의 태도에 물들기를 바랐다. 대신에 나는 가난뱅이는 보통 계속 가난하기 마련이라는 것을 깨우쳤다.” (276쪽)

헨리 치나스키는 ‘호밀밭의 파수꾼’ 홀든 콜필드와 더불어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안티히어로 중 하나다. 영웅적 면모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 볼 수 없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반(反)영웅의 영웅담을 그리는 이 미국식 서사문법은 전 세계에 파급효과를 떨치며 면면한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대체로 소년의 성장담에서 그치는 여타 안티히어로 소설과 달리 헨리 치나스키는 생애를 일관한 밑바닥 인생의 전범을 시리즈 형식을 통해 보여줬다는 점에서 남다른 깊이를 획득한다.

작가 찰스 부코스키(1920-1994)의 자전적 이야기인 ‘헨리 치나스키 시리즈’는 흥미롭게도 중년기와 청년기를 거쳐 마지막에야 자아의 원형이 형성된 유년기로 향하는데, 바로 ‘호밀빵 햄 샌드위치’(1982)가 그 작품이다. 매질을 일삼던 폭력적 아버지,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는 게 최고의 사명이었던 무력한 어머니, 가난한 실직자이면서도 부자인 양 가난을 멸시했던 혐오스런 부모 밑으로 다시 돌아가는 고통스런 귀향이었기에 작가 자신, “가장 힘들고 느리게 쓴 소설”이라고 말한 바 있다.

헨리 치나스키가 작가의 자전적 분신이므로 캐릭터의 매력은 작가, 그 자체로부터 비롯된다. 대학 중퇴 후 이렇다 할 문학적 성과를 내지 못한 부코스키는 공장과 창고를 전전하는 하급노동자로 살아가다 우연히 우체국에 취직했다. 12년째 우편물 분리 직원으로 일하던 중, 매달 100달러를 월급으로 줄 테니 전업작가가 되라는 눈 밝은 출판사의 제안을 받고 본격적으로 문학에 뛰어든 그-무려 24년간 월급을 받았다-는 알코올과 호색행각 등으로 점철된 가난한 중년 노동자의 삶을 그린 첫 장편소설 ‘우체국’(1971), 글쓰기를 포기하고 방황하던 청년기의 이야기 ‘팩토텀’(1975) 등을 먼저 선보인 후 ‘호밀빵 햄 샌드위치’를 썼다.

1930년 미국을 배경으로 독일계 이민자 소년의 성장과정을 그리는 ‘호밀빵 햄 샌드위치’는 폭력과 고독과 분노가 생의 에너지였던 소년이 마침내 문학과 ‘접신’하기까지의 삶을 그린다. 가난한 사람들의 마을에 살면서 가난한 집 아이들과 놀지 못하게 했던 부모는 “부자가 되고 싶어서 자기들이 부자라는 상상을 하곤 했”던 인물들이다. 친구를 사귀지 못하고 따돌림 당하는 아들을 아버지는 못난 놈이라며 죽도록 팬다. 모든 것이 매질의 이유이므로 이유는 없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헨리는 만만한 아들이 아니다. 비명을 지르면 그만 팰 거라는 걸 알지만, “비명을 지르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욕망을 알기에” 입을 열지 않는다. “아버지는 나를 때리면서 나무랐지만, 아무 말도 이해할 수 없었”던 ‘나’에게는 고통과 분노만이 남는다.

가정과 학교에서 약육강식의 생존논리를 체득한 헨리는 제법 능수능란하게 폭력을 휘두를 줄 알게 되면서 아버지까지 제압한다. 성에도 눈을 뜬다. 하지만 한번도 사랑 받은 적 없는 존재의 갈증은 해갈되지 않는다. 학교의 모든 여학생과 섹스를 해서 “세상을 나랑 똑같이 생긴 애들로 채워야지” 상상했던 원대한 야심은 사춘기 시절 피부질환이 남긴 심각한 흉터로 인해 바스라진다.

‘상처받은 거친 소년을 다독여준 문학의 힘’으로 전개되는 서사의 결말은 다소 상투적이지만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아버지 때문에 가지 못한 후버 대통령 연설 이벤트에 대해 거짓말로 써낸 글이 ‘가장 훌륭한 글’로 꼽히는 장면이다. “그래, 사람들이 원했던 건 그거였다. 거짓말. 아름다운 거짓말.”

생생한 밑바닥의 언어가 전달하는 핍진성이 이 소설에는 있다. 읽다 보면 누구든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이 실은 빈자로 하여금 빈자의 정체성을 갖지 못하게 하는 기만적 판타지임을 문득 깨닫게 되는데, 이것이 80여년이 지난 대한민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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