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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곳이 적당해서 좋았던 ‘도깨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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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곳이 적당해서 좋았던 ‘도깨비 여행’

입력
2017.01.23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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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와 지은탁의 운명적인 만남, 강릉 주문진 방사제

묵직하고 고요한 서로의 고백, 월정사 전나무숲 길

누군가를 기다리는 ‘도깨비’의 운명을 닮은 인천 배다리 헌책방 거리

드라마 '도깨비' 이후 관광 명소가 된 강릉 주문진 방사제. 조두현 기자
드라마 '도깨비' 이후 관광 명소가 된 강릉 주문진 방사제. 조두현 기자

‘도깨비’가 끝났다. tvN의 드라마 ‘쓸쓸하고 찬란하神-도깨비’는 지난해 12월 2일부터 지난 21일까지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오후 8시에 수많은 시청자를 TV 앞으로 소환했다. ‘도깨비’ 팬들에게 금요일과 토요일은 ‘도요일’이었다. 금요일엔 ‘불금’ 대신 ‘도깨비’였고, 토요일엔 MBC ‘무한도전’ 다음 바로 이어서 ‘도깨비’였다. 마지막 회인 16회는 평균 시청률 20.5%, 순간 최고 시청률 22.1%(닐슨코리아 기준)를 기록하며 지난해 1월 16일 ‘응답하라 1988’의 마지막 회가 세운 최고 기록을 1년 만에 깨버렸다.

‘파리의 연인’, ‘시크릿 가든’, ‘태양의 후예’ 등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의 대모라고 할 수 있는 김은숙 작가의 톡톡 튀는 대사는 금세 유행어가 됐고, 등장인물이 입은 옷과 손에 든 소품은 실시간으로 화제가 됐다. ‘도깨비’와 ‘저승사자’라는 소재를 참신하게 재해석했고, 외로운 현대인의 감성을 현실적인 판타지로 잘 쓰다듬어주었다.

무엇보다 이색적인 로케이션은 극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힘있게 끌고 가며 장엄하고 낭만적인 영상미를 완성했다. 캐나다 퀘벡을 제외하고 모두 국내에서 촬영했지만, 방영과 함께 포털 사이트에는 ‘도깨비’의 촬영지를 묻는 말이 쇄도했다. 누리꾼들의 빠른 정보 공유 덕분에 촬영지는 곧바로 관광 명소가 됐다. 중간에 억지스럽게 끼어들어 극의 몰입을 흐트러뜨린 PPL을 제외하곤 모든 장소가 900년 넘게 산 도깨비의 클래식하고 환상적인 캐릭터와 적당해 좋았다.

‘도깨비’를 이대로 보낼 수 없어 종영 시기에 실제 주요 촬영지를 여행하며 극을 회상했다. 모든 장소마다 ‘깨비앓이’를 하며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붐볐다. 판타지 드라마와 현실의 경계는 모호했다. ‘도깨비’에서 묘사된 판타지는 우리의 삶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극 중에서 도깨비 김신(공유)이 타고 나온 마세라티 르반떼와 여정을 함께 했다. 순간 이동을 할 수 있는 도깨비에게 차는 무용지물이지만 인간 여자친구가 생긴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르반떼의 날카로운 눈매와 삼지창 엠블럼, 그리고 카랑카랑한 배기음은 그 어느 차보다 도깨비와 잘 어울렸다.

마지막 회가 방송되던 날 그리고 여행을 마무리 지었던 날, 많은 눈이 내렸다. 마치 ‘비가 되어, 첫눈이 되어, 바람이 되어 너에게 가겠다’는 도깨비의 약속처럼.

한미서점과 모카책방, 주인을 기다리는 낡은 책과 같은 운명

한미서점 앞에서 서로의 머리를 쓰다듬는 김신과 지은탁. tvN 방송 화면 캡처
한미서점 앞에서 서로의 머리를 쓰다듬는 김신과 지은탁. tvN 방송 화면 캡처

‘생(生)이 나에게로 걸어온다. 죽음이 나에게로 걸어온다. 생(生)으로 사(死)로. 너는 지치지도 않고 걸어온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야 마는 것이다. 서럽지 않다. 이만하면 되었다. 된 것이다, 하고.’

도깨비 신부인 지은탁(김고은)이 도깨비 김신을 향해 걸어올 때 김신이 지은탁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독백이다. 935년 전 김신의 가슴에 꽂힌 검을 오직 도깨비 신부만이 뽑아 무(無) 즉, 영원한 안식으로 돌아갈 수 있기에 지은탁은 도깨비에게 죽음이다. 김신은 그런 지은탁을 바라보며 삶과 죽음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흔들린다. 그렇게 바랐던 죽음이지만 첫사랑은 삶을 더 집착하게 한다.

“구해달란 말에 답해 준 게 아저씨인 거, 그게 새삼 너무 기적 같고, 좋아서….”

과거 뺑소니 차에 치여 죽어가던 엄마를 살려 준 게, 그리고 결과적으로 엄마 배 속에 있던 자신을 살린 게 도깨비임을 안 지은탁은 뜨거운 눈물을 내뱉는다. 둘은 서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함께 위로한다. 배경이 되는 헌책방의 낡은 미장센과 샛노란 벽은 둘의 감정에 온기를 불어 넣어준다.

실제 한미서점의 모습. 지금도 다양한 헌책을 사고 판다. 조두현 기자
실제 한미서점의 모습. 지금도 다양한 헌책을 사고 판다. 조두현 기자

이 장면은 인천 금곡동 배다리 헌책방 골목에 자리한 한미서점 앞에서 촬영됐다. 실제로 헌책을 사고파는 이곳은 김은숙 작가가 직접 선택한 촬영지이기도 하다. 배다리 골목의 헌책방 역사는 70년이 다 돼간다.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책과 전쟁으로 유출된 책들이 중고로 쏟아져 나오면서 헌책방 거리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들어 서울 청계천과 부산 보수동과 함께 전국 3대 헌책방 거리로 인정받기도 했다. 단순히 책을 사고파는 의미를 넘어 지식인들의 커뮤니티 공간 역할도 했다. 하지만 디지털과 모바일의 시대인 지금은 겨우 그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어서 안타깝다. 실제 거리는 황량했다. 드문드문 한미서점의 노란 벽을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찍는 관광객들만 오갈 뿐이었다.

서울 성수동의 모카책방 벽화. 이번 여행은 실제 드라마에 등장했던 마세라티 르반떼와 함께 했다. 조두현 기자
서울 성수동의 모카책방 벽화. 이번 여행은 실제 드라마에 등장했던 마세라티 르반떼와 함께 했다. 조두현 기자

김신은 지은탁에게 책을 많이 읽어 지적이고 그림 좀 볼 줄 아는 교양 넘치는 사내로 보이고 싶어 한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소환(지은탁이 불을 불면 김신이 ‘짠’하고 소환된다)될 지 몰라 항상 책을 들고 다니는 이유다. 3회에서 지은탁이 오징어에 붙은 불을 끄다가 실수로 김신을 소환하는데, 김신은 자연스럽게 벽에 기대어 서서 마치 언제나 책을 읽고 있다는 듯 익살과 허세를 부린다. 이때의 배경이 된 그리고 한미서점처럼 노란 색감의 벽화로 꾸며진 곳은 서울 성수동의 맥심 모카책방이다. 지난해 4월부터 6월까지 동서식품에서 한시적인 팝업스토어로 운영했고 지금은 벽화만 남았다.

한미서점 안에 빼곡하게 켜켜이 꽂혀 있는 책들을 보며 문득 낡은 기억이 저장된 디스크가 모인 하나의 서버가 연상됐다. 아프리카에선 노인의 죽음을 도서관이 불타서 없어지는 것에 빗대곤 한다. 이때 책은 노인의 경험과 지식이 망라된 하나의 셀 조직을 비유한 것일 테다. 935년간 지옥 같은 현생을 살아온 도깨비의 기억 속 책장엔 어떤 책들이 꽂혀 있을지 상상해본다.

운현궁,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도깨비 터

실제 운형궁 양관의 모습. 도깨비 집의 외관만 촬영했다. 조두현 기자
실제 운형궁 양관의 모습. 도깨비 집의 외관만 촬영했다. 조두현 기자

국내의 도깨비도 더는 오래 묵은 버드나무가 아닌, 서양의 드라큘라 백작처럼 근사하고 큰 집에서 살게 됐다. 집이라기보다 궁전에 가까운 도깨비 터는 실제 서울 종로구 운니동의 운현궁 양관을 배경으로 했다. 일반적인 집보다 고급스럽고 예스러운 정취가 묻어났다. 지난 2006년 MBC에서 방영한 드라마 ‘궁’의 촬영장소이기도 했다.

김신의 가슴에 꽂힌 칼이 보인다고 고백하는 지은탁. tvN 방송 화면 캡처
김신의 가슴에 꽂힌 칼이 보인다고 고백하는 지은탁. tvN 방송 화면 캡처

극 중에서 이곳은 도깨비와 저승사자(이동욱), 지은탁이 함께 사는 곳으로 나온다. 도깨비 터는 악귀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도깨비 신부가 머물기에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다. 이곳 현관 앞에서 지은탁은 김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검이 보인다고 말하며 극적인 전환을 가져온다. 그래서인지 그때의 그 장면을 따라 하며 사진 찍는 사람들이 많다.

운현궁 양관의 현관 모습. 이 앞에서도 많은 신이 촬영됐다. 조두현 기자
운현궁 양관의 현관 모습. 이 앞에서도 많은 신이 촬영됐다. 조두현 기자

르네상스 양식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운현궁 양관은 과거 흥선대원군이 사저로 이용했다가 그의 둘째 아들인 고종이 12세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이후 고종의 손자 이우가 물려받아 ‘이우공저’라고 부르기도 했다. 원래는 일제가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에게 선물로 지어 줬다. 이준용은 처음엔 극단적인 반일주의자였으나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친일 노선을 걸었다. 지금은 덕성여대가 보유 중이다. 1948년부터 학교 본관으로 쓰이다 지금은 재단 사무실로 이용 중이다. 현재 리모델링 공사 중이어서 내부는 텅 비었다. 즉, 도깨비 집의 외관으로만 촬영됐을 뿐 집의 실내는 남양주의 세트장에서 촬영됐다. 양관을 비롯한 운현궁 전체는 무료로 둘러볼 수 있다.

월정사 전나무숲, 도깨비의 진심 어린 고백

눈으로 가득 덮인 전나무숲 길에서 김신은 지은탁에게 진심을 털어 놓는다. tvN 방송 화면 캡처
눈으로 가득 덮인 전나무숲 길에서 김신은 지은탁에게 진심을 털어 놓는다. tvN 방송 화면 캡처

“무서워. 너무 무섭다. 그래서 네가 계속 필요하다고 했으면 좋겠어. 그것까지 하라고 했으면 좋겠어. 그런 허락 같은 핑계가 생겼으면 좋겠어. 그 핑계로 내가 계속 살아있으면 좋겠어. 너와 같이.”

김신의 가슴에 꽂힌 검을 뽑는 순간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을 안 지은탁은 김신 곁을 떠난다. 김신은 지은탁의 수학능력시험 성적표를 핑계로 스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지은탁을 찾아온다.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결국 삶에 좀 더 욕심을 낸 진심을 말한다. 마치 연인이 잠시 헤어졌다 다시 만날 때 묵직하고 고요하게 속내를 탈탈 털어놓듯.

눈이 녹은 월정사 전나무숲 길. 사시사철 맑은 피톤치드가 쏟아져 나온다. 조두현 기자
눈이 녹은 월정사 전나무숲 길. 사시사철 맑은 피톤치드가 쏟아져 나온다. 조두현 기자

이 장면은 강원도 평창 오대산 자락에 있는 월정사 전나무숲 길에서 촬영됐다. 주차장 근처 금강교에서 일주문까지 1㎞ 남짓한 짧은 길이지만 왕복으로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 심신의 안정을 얻을 수 있다. 길 양쪽으로 80년 넘게 산 전나무들이 1,700그루 넘게 빼곡히 도열해 있다. 이 나무들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연인들의 비밀스러운 속삭임을 들었을까? 누군가를 마음에 품고 있다면 이 길을 걷다가 고백하는 건 어떨까? 고요하고 탁 트인 숲은 더할 나위 없는 묘한 로맨스를 선사한다.

강릉 주문진 방사제, 운명적인 만남

김신과 지은탁, 둘의 운명적인 만남. tvN 방송 화면 캡처
김신과 지은탁, 둘의 운명적인 만남. tvN 방송 화면 캡처

이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가 아닐까? 김신과 지은탁은 이곳에서 처음 만난다. 지은탁은 19살 생일을 맞아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불면서 자축한다. 그때 메밀꽃밭에 있던 김신은 그대로 이곳으로 소환된다. 손에 메밀꽃 한 다발을 든 채.

“근데 그 꽃은 뭐에요? 줘봐요. 아저씨랑은 안 어울려요. 줘도 돼요. 오늘 제 생일이거든요. 아주 우울한 생일. 난 주로 생일날 풀을 받네. 9살 땐 배추 받았거든요. 근데 메밀꽃은 꽃말이 뭘까요?” / “연인.”

강릉 주문진 영진해변의 방사제. 이곳에서 실제로 둘의 만남이 촬영됐다. 조두현 기자
강릉 주문진 영진해변의 방사제. 이곳에서 실제로 둘의 만남이 촬영됐다. 조두현 기자

거친 파도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생각나게 한다.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의 마지막 장면처럼 파도를 보고 있으면 내가 마주하고 있는 게 삶인지 죽음인지 알쏭달쏭하다. 한 발자국 더 들어가면 죽음 속으로 휘몰아쳐 빨려 들어갈 것 같고, 해안에서 성난 파도의 꿈틀거림을 보고 있으면 아직 살아있음에 감사하다. 국내에서 이런 느낌의 굵은 파도를 볼 수 있는 곳은 동해안뿐이다. 서해는 얕고, 남해는 잔잔하다.

강릉 주문진 영진해변의 방사제엔 도깨비 덕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방사제는 힘센 파도가 해안의 모래를 이동시켜 침식하지 않도록 막는 구조물이다. 바다 쪽으로 길게 뻗어 있어 마치 파도를 배경으로 한 단독 무대처럼 보인다. 김신과 지은탁의 극적인 첫 만남, 그리고 둘의 심리를 묘사하기에 가장 적당한 배경이다.

사람들이 줄지어 기념사진을 남기고 있다. 조두현 기자
사람들이 줄지어 기념사진을 남기고 있다. 조두현 기자

이곳에선 누군가 빨간 목도리와 메밀꽃다발을 1,000원에 빌려주고 있다. 잠시라도 김신과 지은탁이 되고픈 연인 혹은 그냥 추억을 남기고픈 사람들이 질서 있게 줄을 서 차례대로 사진을 찍는 진풍경이 연출된다. 여자친구의 성화에 못 이겨 카메라에 타이머를 맞춰놓고 쭈뼛쭈뼛 메밀꽃다발을 건네는 남자들의 모습도 재미있다.

강릉 주문진의 성난 파도. 조두현 기자
강릉 주문진의 성난 파도. 조두현 기자

‘도깨비’에 홀려 이곳까지 찾아온 사람들과 그들 뒤로 넘실거리는 파도를 보며 도깨비를 잠시 생각했다. 예부터 도깨비는 설화 속에서 인간의 물질적인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도구 혹은 그러한 심리가 투영된 상상 속의 존재로 등장했다. 그래서 초자연적인 힘과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다. 험상궂게 생겼지만, 사람을 해치진 않으며 심술을 부릴 뿐이다. 그들의 나라는 이상하고 아름다우며 방망이를 휘두르면 사람이 그토록 원하는 금은붙이가 뚝딱 생긴다. 도깨비가 원하는 건 재미있는 이야기, 아름다운 노랫소리, 내기에서 이기는 것 등이다. 물질에 대한 욕심보다 풍류와 낭만 그리고 의리를 추구한다. 이는 어쩌면 사람들이 현실 속에서 은근히 바라는 삶의 지향점이다. 현실은 그와 달라서 우리는 도깨비를 통해 대리만족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두현 기자 joec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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