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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커버그는 되고, 메르켈은 안 되는 ‘단벌패션’의 정치학

입력
2016.01.2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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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저커버그의 회색 티셔츠와 후디로 가득한 단출한 옷장. 54조원 자산가의 검소한 단벌패션이라는 상찬은 그가 여자였어도 적용됐을까? 저커버그 페이스북 사진
마크 저커버그의 회색 티셔츠와 후디로 가득한 단출한 옷장. 54조원 자산가의 검소한 단벌패션이라는 상찬은 그가 여자였어도 적용됐을까? 저커버그 페이스북 사진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가 두 달간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출근하면서 페이스북에 올린 옷장 사진이 큰 화제를 모았다. ‘복직 첫 날. 뭘 입지?’라는 간단한 글과 함께 똑같은 회색 반소매 티셔츠와 쥐색 후디로 가득한 옷장을 보여준 그에게 세계는 열광했다. 사진을 올린 지 이틀 만에 120만개의 ‘좋아요’가 답지하고, 7만1,200개의 댓글이 달렸다. 인류공동체에의 헌신을 사명으로 하는 젊은 거부의 소박한 라이프스타일은 재산 99% 기부 선언을 배경막 삼아 빛을 발했다.

그런데 저커버그가 만약 여자였다면? ‘그녀’는 저커버그처럼 찬탄을 받을 수 있었을까? ‘단벌 패션’을 철학으로 내세울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을 보면 쉽게 그 답을 유추할 수 있다. 언제나 쓰리버튼 재킷에 통 넓은 정장 바지를 입는 그녀의 일관된 스타일은 끊임없이 ‘패션 테러’라는 조롱을 받아왔다.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칼 라거펠트는 “메르켈은 자신의 특별한 비율에 맞춰 옷을 입어야 한다”며 “너무 긴 바지, 너무 타이트한 재킷, 끔찍한 컬러. 모든 게 다 틀렸어! 앞머리도 안 어울려!”라고 언론을 통해 비판했다(이듬해 “이번엔 괜찮네”라고 ‘칭찬’하기는 했지만). 메르켈의 색깔만 달라지는 똑같은 팬트수트 스타일을 풍자해 2012년 네덜란드의 한 그래픽 디자이너는 색깔만 바뀌는 팬톤 메르켈 룩 차트를 만들어 ‘비극의 스펙터클’이라는 제목을 붙이기까지했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인 재닛 옐런도 똑같은 재킷을 한 달 새 두 번 입고 공식석상에 등장했다는 이유로 지적을 받은 바 있다. 남성 권력자가 같은 옷을 입고 나오면 검소의 상징이지만, 여성 권력자가 같은 옷을 반복해 입는 것은 패션에 대한 테러. 저커버그는 되고 메르켈은 안 되는 ‘단벌 패션’. 이 이중잣대의 정치성을 삐딱하게 해부해 보자.

네덜란드 그래픽 디자이너 누르체 반 이켈렌이 만든 팬톤 메르켈 룩 차트. 이켈렌 홈페이지
네덜란드 그래픽 디자이너 누르체 반 이켈렌이 만든 팬톤 메르켈 룩 차트. 이켈렌 홈페이지

“옷 고르는 데 시간 뺏기기 싫다”

저커버그가 단벌 패션의 효시는 아니다. 검정 터틀넥 티셔츠에 리바이스 청바지, 뉴발란스 스니커즈로 유명한 전설적 인물 스티브 잡스가 이미 있었고, 더 앞서는 아인슈타인의 회색 수트가 있다. 전기작가들은 “아인슈타인이 교복처럼 입던 회색 정장은 그의 둘째 부인이 입혀준 것이며, 훗날 그는 다양한 색깔의 스웨터 등을 즐겨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패션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천재의 이미지는 이미 회색 수트 속에 박제돼 있다. 미국 영화감독 크리스토퍼 놀란도 기숙학교 시절 교복 재킷을 아직까지 매일 입고 다니는 걸로 유명하다.

모두 남성인 이 걸출한 인물들이 유니폼 패션을 고수하는 이유는 ‘선택 피로’를 줄이기 위해서다. 저커버그는 2014년 열린 타운홀미팅 Q&A 세션에서 ‘왜 회색 티셔츠만 입느냐’는 질문을 받고 “나는 내 삶을 간결하게 만들고 싶다. 공동체에 가장 잘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제외하고는 가능한 최소의 의사결정만 하고 싶다”고 답했다. 회색과 푸른색 수트만 입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똑같은 질문에 “단순한 의사결정 행위가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는 능력을 감소시킨다”는 연구결과를 인용하며 “결정 피로를 줄이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오트쿠튀르 패션으로 우아한 스타일을 뽐내는 IMF 총재 크리스틴 라이가르드. 라가르드 페이스북 사진
오트쿠튀르 패션으로 우아한 스타일을 뽐내는 IMF 총재 크리스틴 라이가르드. 라가르드 페이스북 사진

그렇다면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크리스틴 라가르드의 경우를 보자. 유로존 붕괴의 위기를 막아내며 최근 재선 도전을 공표한 라가르드는 다채로운 오트쿠튀르 패션으로 우아하면서도 시크한 스타일을 연출하는 걸로 유명하다. 샤넬 수트와 에르메스 스카프를 애용하는 라가르드는 진주 귀고리와 어깨 브로치로 여성의 우아한 힘을 과시하며 옷차림에 따라 ‘깔맞춤’으로 구비한 에르메스 켈리백을 바꿔 드는, 보그지에 인터뷰가 실릴 정도의 패셔니스타다. 라가르드는 과연 저커버그보다 중요한 결정을 덜하는 걸까? 종류도, 색깔도, 매는 법도 날마다 바뀌는 에르메스 스카프와 그녀의 결정 피로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화려한 드레스 차림으로 프레젠테이션에 나선 야후 CEO 마리사 메이어. AP연합뉴스
화려한 드레스 차림으로 프레젠테이션에 나선 야후 CEO 마리사 메이어. AP연합뉴스

물론 직종의 차이가 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외교와 의전에 신경 써야 하는 라가르드와 자유분방한 문화의 IT 기업 대표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할 수는 없다. 저커버그도 박근혜 대통령과 만날 때는 수트를 입었다. 그렇다면 이제 똑같은 IT 기업인 야후의 CEO 마리사 메이어가 등장해야 할 때. 매년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열리는 패션 갈라쇼 ‘멧갈라(Met Gala)’에서 메이어는 오스카 드 라 렌타의 화사한 다홍드레스를 입고 나타나 지난해의 베스트드레서 중 하나로 꼽혔다. 회사에 출근할 때나 백악관 초청행사에 참석할 때나 대체로 드레스에 카디건 차림인 그녀는 “권력과 패셔너블함이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비뚤어진 마음은 묻는다. 야후에는 결정할 일들이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은 걸까? 메이어가 회색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무대에 올랐다면 어떤 반응이 나왔을까? 보통사람처럼 옷을 입는 것은 남성에게는 친근감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검박함의 상징이지만, 왜 여성에게는 미덕이 아닐까?

결정할 게 너무 많아 먹고 입는 것만큼은 결정하지 않겠다는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를 두고 가디언은 "에볼라 신약 개발자였다면 더 좋았을 발언"이라고 비꼬았다. AP연합뉴스
결정할 게 너무 많아 먹고 입는 것만큼은 결정하지 않겠다는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를 두고 가디언은 "에볼라 신약 개발자였다면 더 좋았을 발언"이라고 비꼬았다. AP연합뉴스

“패션이 하찮다면 남녀 모두에게 똑같이”

저커버그는 단벌 패션에 대한 철학을 밝힌 타운홀미팅에서 다소 문제적인 발언을 했다.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10억 명 이상에게 기여하는 운 좋은 위치에 올라갔다. 내 생활에서 우스꽝스럽거나 하찮은(silly or frivolous) 것들에 에너지를 쓸 때면 본분을 다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며 “내 모든 에너지를 최고의 상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데만 바치고 싶다”고 말했다. 패션 애호가들 사이에서 밑줄이 쫙 그어진 부분은, 익히 예상할 수 있듯 “우스꽝스럽거나 하찮은”. 순식간에 패셔너블한 여성 권력자들을 하찮은 데 정신이 팔려 본분에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로 만들어 버린 발언이었다. “나는 패션에 관심이 없고 감각도 없어 선택하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가 든다. 그래서 유니폼을 입기로 했다”고 말했으면 좋았을 것을!

가장 신랄한 비아냥은 영국 가디언에서 나왔다. 가디언은 ‘저커버그의 회색 티셔츠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더 ‘패션’인 다섯 가지 이유’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우스꽝스럽고 하찮은 것에 대한 고상한 경멸은 저커버그가 에볼라 치료제 개발연구실로 달려가고 있었다면 더 그럴 듯했을 것”이라고 비꼬았다. “인류 진보에 대한 저커버그의 헌신이 흔한 일출 사진이나 ‘당신 어머니의 친구의 딸이 쌍둥이 배변 훈련을 어떻게 시키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업데이트로 인터넷을 가득 채운 것임을 떠올리면 이 반응도 다소 약한 것”이라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패션에 대한 관심 유무, 직종과 성별의 차이를 떠나서 단벌 패션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스타일이다. 단벌 패션 자리에 ‘시그니처 룩’이라는 말을 넣어보면 그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독설가 칼 라거펠트는 패션의 교황으로 불리고 있지만 언제나 깃이 빳빳한 검정 수트에 흰 셔츠, 가죽 장갑과 선글래스라는 유니폼을 입고 다닌다. 조르지오 아르마니도 항상 네이비 컬러의 라운드 네크라인을 입고, 마이클 코어스도 매일 똑같은 검정 재킷을 입고 다닌다. 자신에게 무엇이 가장 잘 어울리는지를 정확하게 아는, 자신의 정체성과 옷차림이 혼연일체를 이룬 패션이 시그니처 룩이다. 브랜드를 구축하기 위한 패션의 전략이 시그니처 룩이며, 저커버그는 이미 패션의 전략을 차용하고 있다는 게 가디언의 지적이다.

매일 똑 같은 옷 입겠다는 마틸다의 메시지

사실 매일 뭘 입을지 결정하는 것은 굉장히 수고로운 일이다. 여기 저커버그 이전에 과감하게 ‘단벌 패션’을 시도해 화제가 된 여성 용자(勇者)가 있으니, 이름 하여 마틸다 칼. 세계적 광고대행사 사치앤사치의 뉴욕사무소 아트 디렉터다. 4년 전 월요일 아침, 이른 시간 열리는 중요한 회의에 뭘 입고 갈지 고민하다가 늦어버린 그녀는 엉망진창인 하루를 보내고 분노 속에서 결심한다. 매일 똑같은 옷을 입고 출근하겠다! 똑같은 흰 블라우스와 검정 바지 15벌을 하루에 사버린 그녀는 가죽끈으로 목에 리본을 맨 차림새를 자신의 시그니처 룩으로 정하고, 3년간 실행에 옮겼다.

당연히 저커버그처럼 칭송 받지 못했다. 기인일 뿐이었다. 도대체 왜 똑같은 옷만 입고 다니냐, 종교적 신념이 있느냐 등등의 다채로운 질문과 편견에 시달려야 했다. 그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은 저커버그의 회색 티셔츠로 인해 ‘왜 성공한 남자들은 매일 똑같은 옷을 입는가’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오면서부터. 그녀는 지난해 패션지 하퍼스 바자에 기고한 글에서 “내가 개인 유니폼 패션을 입고 다닌 지 2년 후에 나온 기사들이었다. 나는 매일 같은 옷을 입기로 한 내 결정을 남들로부터 승인 받는 데 남성의 권위가 필요했던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글에서 “여성은 완벽한 외모를 유지해야 한다는 과도한 압력, 도달할 수 없는 높은 기대의 산과 궁극적으로 맞닥뜨리게 된다”며 “사적 유니폼을 입기로 한 선택이 나를 생각의 낭비로부터 구원했다”고 단벌 패션을 칭송했다.

저커버그 이전에 단벌 패션을 추구해온 여성 뉴요커 마틸다 칼(맨 앞 가운데)이 '마틸다처럼 입기 데이'에서 활짝 웃고 있다. 마틸다 칼 페이스북 사진
저커버그 이전에 단벌 패션을 추구해온 여성 뉴요커 마틸다 칼(맨 앞 가운데)이 '마틸다처럼 입기 데이'에서 활짝 웃고 있다. 마틸다 칼 페이스북 사진

“운전석을 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작은 변화가 큰 차이를 만든다”고 믿는 마틸다 칼은 패션을 통해 유쾌한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다. 마틸다의 단벌 패션의 의의를 기리기 위해 회사 차원에서 남녀노소 불문, 마틸다와 똑같은 옷을 입고 출근하는 ‘마틸다처럼 입는 날’을 지정한 것이다. 지난해 4월 23일 열린 ‘마틸다 데이’는 패션이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면 그건 남녀 모두에게 그래야 하며, 그래도 패션은 자아의 표현으로 삶의 중요한 활력소라고 생각한다면 이 역시 남녀 모두에게 그러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일대 사건이었다. 패셔니스타의 길을 가든, 단벌패션을 고수하든, 잣대는 동일하게. 패션은 그래서 정치고, 권력이다.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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