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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평화는 대나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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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평화는 대나무처럼

입력
2018.06.12 15:04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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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가 한창이다. 벼를 심는다. 계-문-강-목-과-속-종이라는 분류체계에서 벼는 식물계 속씨식물문 외떡잎식물강 벼목 벼과에 속한다. 벼과는 고등식물 가운데 가장 큰 과다. 여기에는 550속 1만 종 가량이 알려져 있다. 우리가 식량으로 사용하는 벼, 밀, 옥수수도 벼과 식물이다.

벼과 식물은 한해살이풀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매년 벼와 밀 그리고 옥수수를 심어야 한다. 하지만 벼과 식물에도 나무가 있다. 92속 5,000종 가량이 알려진 대나무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까 벼과 식물 종의 절반은 대나무인 셈이다. 우리나라에도 4속 14종이 있다. 벼, 밀, 옥수수 그리고 대나무의 이파리는 비슷하게 생겼고, 그 안에 있는 잎맥은 그물처럼 생기지 않고 나란히 그어져 있는 줄 모양이다.

벼과 식물의 절반을 차지하는 대나무는 다른 벼과 식물과는 확연히 다른 특징이 있다. 대나무는 꽃이 잘 피지 않는다. 식물의 꽃은 생식기관이다. 자신의 삶이 다할 무렵 후손을 남기기 위한 장치다. 대나무가 숲을 이루는 까닭은 꽃이 피고 씨앗이 퍼져서가 아니라 땅속줄기가 넓게 퍼져나가면서 빈자리에서 순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부드러운 죽순을 즐겨 먹는다. 사람뿐만 아니라 대나무여우원숭이와 판다도 죽순을 먹는다. 판다는 짝짓기를 하는 봄에는 질소와 인이 풍부한 죽순을 먹고 여름에는 칼슘이 많은 어린 대나무 잎을 먹는다. 판다의 조상은 원래 육식을 하는 곰이었다. 그런데 환경이 급격하게 변하면서 먹잇감이 대부분 사라지던 420만 년 전에 마침 단백질의 맛을 느끼는 유전자 기능을 잃게 되면서 대나무를 먹게 된 것으로 보인다.

대나무는 자기 수명이 다할 때쯤에야 꽃을 피운다. 100년을 기다려야 꽃이 피는 대나무도 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같은 뿌리에서 나온 대나무 줄기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 같은 해에 꽃을 피운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대나무를 떼어서 멀리 떨어진 곳에 심어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대나무 숲이 어느 날 갑자기 한꺼번에 사라지기도 한다.

대나무는 이름과 달리 나무가 아니다. 나무 백과사전을 아무리 뒤져봐도 대나무는 나오지 않는다. 나무가 되려면 몇 가지 자격이 필요한데 가장 중요한 것은 부름켜(형성층)가 있느냐는 것이다. 부름켜가 있어야 부피 생장을 하면서 굵어진다. ‘아니, 가느다란 대나무도 있지만 굵은 대나무도 있지 않은가. 이것은 대나무도 점차 굵어진다는 뜻 아냐?’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부름켜가 없는 외떡잎식물은 절대로 굵어질 수 없다. 될 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처럼 죽순을 보면 대나무의 굵기를 알 수 있다. 대나무 굵기는 죽순 때 이미 결정된다. 죽순의 굵기가 바로 대나무의 굵기다.

대나무는 그 어떤 나무보다도 빨리 자란다. 싹이 튼 이후에는 죽순이 하루에 1m 이상 자라기도 한다. 오죽하면 우후죽순이란 말이 있겠는가. 이렇게 빨리 자라는 데는 몇 가지 비결이 있다. 첫째는 속이 비어 있는 것. 벼와 강아지풀 같은 벼과 식물도 줄기 속이 비어 있다. 속을 채우는 데 양분을 쓰지 않고 줄기 껍질 부분을 키우는 데 집중해서 다른 나무보다 수십 배 빨리 성장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생존에 유리한 특징이다. 빨리 자라야 햇빛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엄마 나무가 제공하는 영양분이다. 대나무 숲의 대나무들은 땅속줄기로 연결되어 있다. 수십일 만에 집중적으로 성장한 대나무는 열심히 광합성을 해서 자신의 굵기를 키우는 데 쓰는 대신 아기 나무를 위해 땅속줄기를 통해 영양분을 공급한다.

셋째는 마디다. 대나무가 성장하면서 마디 수가 늘어나는 게 아니다. 대나무의 마디는 죽순에 이미 정해져 있다. 왕대는 71개, 솜대는 43개, 죽순대에는 73개의 마디가 있다. 각 마디에는 길이를 키우는 생장점이 있는데 각 마디의 생장점이 동시에 작동한다. 기관차 한 대가 수십 칸의 열차를 끌고 가는 게 아니라 수십 대의 기관차로 구성된 기차인 셈이다.

대나무 속이 빈 덕분에 가벼우면서도 마디 칸막이가 있어서 구조가 안정적이다. 마디가 있어서 가늘고 높이 자란 대나무가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는다. 덕분에 사람들에게도 유용한 식물이다. 땔감뿐만 아니라 건축재와 낚싯대로도 쓰인다.

우후죽순을 관찰하는 시기와 모내기하는 시점은 대략 비슷하다. 5월 중순부터 6월 중순까지로 바로 지금이 그때다. 남북 그리고 북미 정상회담도 우후죽순처럼 진행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빨리 자라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죽순에 집중적인 양분 공급이 필요하다. 대나무의 모든 마디가 동시에 성장하는 것처럼 체육, 예술, 철도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동시에 협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꽃 피지 않아도 좋다. 땅속줄기가 넓게 뻗어나가야 한다. 문제는 속도다. 성장의 열매인 평화는 다시 새로운 죽순에게 양분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지난 시대의 과오를 반복하지 말자. 대나무처럼 빠르고 유연하게 평화를 펼쳐나가자. 평화회담이라는 죽순에는 몇 개의 마디가 있었을까?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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