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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나는 병사(病死)하고 싶다

입력
2017.10.31 12:5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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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박물관의 꽃이라 일컬어지는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서 일할 때의 일이다. 자연사(自然史)가 익숙한 말이 아닌지라 많은 사람들이 “자연사박물관은 뭘 전시하는 곳이에요?”라고 묻는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자연사박물관은 사고사 또는 돌연사가 아닌 자연사(自然死)한 생명체를 전시하는 곳입니다”라고 농담처럼 대답하곤 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는 “저도 자연사하고 싶어요”라고 맞장구를 쳤다.

우리는 자연적인 것이라면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인공감미료를 극단적으로 기피하고 천연의 소재로 만든 것을 선호한다. 화학적으로 합성한 약보다는 얼마나 투여되는지 확인할 수 없는 천연약재를 비싼 값에 구입한다. 심지어 의료보험도 적용 안 되는데 말이다. 그러다 보니 죽음마저 자연스러운 죽음, 자연사를 더 선호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자연사란 무엇일까? 간단하다. 굶어 죽든지 아니면 잡아 먹혀서 죽는 거다. 밀림의 왕자 사자도 별 수 없다. 이빨 빠진 늙은 사자도 사냥을 하지 못하고 힘이 빠지면 평소에는 자기에게 꼼짝도 못하던 하이에나 같은 맹수에게 잡아 먹히고 독수리에게 눈알을 뽑힌다. 설마 이 이야기를 듣고서도 자연사 하고 싶은 분이 많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누구나 재미있게 살다가 죽고 싶어 한다.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다. 우리 아버지는 아파트 단지에서 어이없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날도 동창들과 즐거운 술자리를 하시고 집으로 돌아오시던 길이었다. 무슨 일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막내 여동생은 아버지가 고통 없이 현장에서 즉사하신 것에 대해 감사했다. 아버지는 순간적으로 고통 없이 돌아가셨다는 점은 고마운 일이기는 하다. 그런데 나는 그때 비로소 상가에 가서 버릇처럼 이야기하던 ‘황망(慌忙)’이라는 단어의 뜻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짐했다. ‘나는 꼭 병사(病死)해야지’ 하고 말이다. 너무 오래 아프지 않고 조금만 아프다가 죽어야겠다. 그래야 가족들이 마음의 준비도 할 테고 죽기 전에 나눠야 할 이야기도 나눌 테니 말이다.

한국사람 여덟 명 가운데 한 명은 돌연사한다. 아무런 전조 증상을 느끼지 못했는데 갑자기 죽는 것이다. 이유는 한 가지. 심장이 멈췄기 때문이다. 심근경색이다. 물론 심장이 그냥 멈추기야 했겠는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을 테지만 자신이나 가족이 알아차리지도 못 한 상태였을 것이다.

돌연사는 정말 황망하다. 교회 고등부 시절 여학생 후배가 잠을 자다가 죽었다. 교회 집사님도 주무시다 돌아가셨다. 평생 새벽기도회를 빠지지 않던 이가 일어나지 않았지만 아내는 피곤한가 보다 하고 혼자 새벽기도회를 다녀왔는데 여전히 자고 있더라고 했다. 그 집사님의 아들은 어느 날 내게 “내가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그날 아침은 정말 황당했어요”라고 말했다. 이 친구는 아직 ‘황망’이라는 말을 몰랐을 뿐이다.

심근경색은 대부분 자는 동안이 아니라 거리를 다니거나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그리고 운전하다가 일어난다. 이것은 그가 살아날 기회가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지하철 플랫폼에서는 갑자기 쓰러진 시민을 살려내는 심폐소생술 시범 비디오를 볼 수 있다. 하도 봐서 외울 지경이 되었다. ① 환자의 목을 짚어서 맥박이 없으면 입에서 입으로 바람을 불어 넣는다. ② 그리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심장마사지를 시작한다. 이때 체중을 실어서 무려 5센티미터 정도 내려가도록 꾹 눌러야 한다. 두 사람이 도와줄 때는 한 사람이 호흡 한 번 하면 다른 사람이 심장마사지 다섯 번 하고, 만약 혼자 해야 한다면 두 번 호흡하고 열다섯 번 심장마사지를 한다.

심장이 멎으면 뇌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는다. 이 시간이 5분을 넘기면 뇌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즉시 도와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시민들이 많이 다니는 공공장소에는 자동 제세동기가 설치되어 있다. 제세동기는 수천 볼트의 전압으로 1~20암페어의 전기를 순간적으로 흘려 보낸다. 그래서 도와주는 사람이 환자의 몸에 접촉해서 감전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이 또 있다. 119에 전화하는 것이다. 가장 적극적인 사람은 환자에게 달라붙어서 뭔가 조치를 취하고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걱정스럽게 구경만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다들 누군가가 119에 전화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말이다. 환자를 구하려고 달려든 사람은 다른 사람을 정확히 지목해서 부탁해야 한다. “빨간 코트 입은 아가씨, 119에 전화해 주세요.”

모든 일에는 연습이 필요하다. 학교와 직장에서 심폐소생술과 자동 심장제세동기 사용법을 의무적으로 가르치면 어떨까? 취직할 때 토익 점수를 요구하는 것처럼 심폐소생술 자격증을 요구한다면 길거리에서 황망하게 숨지는 일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남의 일이 아니다. 여덟 명 가운데 한 명이 돌연사하고 있다. 자연사하지 말고 끝까지 살아남아서 병사하자.

홍반장 김주혁님, 님의 연기를 기억합니다. 부디 평안하소서.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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