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미환
선임기자

등록 : 2016.12.28 20:00
수정 : 2016.12.30 14:19

대안적 삶 발신하는 비밀기지

다른 생활 탐구 <2> 생활문화 공동체의 '비빌기지'

등록 : 2016.12.28 20:00
수정 : 2016.12.30 14:19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서문에서 횡단보도 건너편 매봉산 자락은 석유비축기지가 있던 자리다.

서울광장의 8배가 넘는 면적에 거대한 탱크 5개를 만들어 1979년부터 총 131만 배럴의 석유를 저장하던 곳이다. 출입 금지 보안시설이던 석유비축기지가 2000년 용인으로 이전함에 따라 방치돼 있던 땅을 서울시는 공연장, 전시장 등 문화공간을 갖춘 공원으로 재생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내년 봄 개장을 목표로 가림막을 친 채 공사가 한창인 이 곳에 비밀기지가 있다. 자립과 지속가능성을 꿈꾸며 대안적 삶을 실험하는 열두 팀이 모인 ‘비빌기지’다. 이들은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공터에 공방, 도서관, 텃밭, 부엌 등 공유 공간을 손수 만들고 일궈 시민들과 만나며 다르게 살기를 발신해 왔다.

비빌기지의 가장 오래된 주민인 문화로놀이짱과 비빌기지 주민들. 고영권 기자youngkoh@hankookilbo.com

버려진 땅에서 ‘다른 삶’을 일구다

시작은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폐목재로 업사이클링 가구를 만드는 사회적기업 문화로놀이짱이 2010년 이곳에 처음 들어왔다. 홍대 앞 공터에서 3년간 토요일마다 ‘OO시장(땡땡시장)’이라는 이름으로 공유가게를 실험했던 ‘문화로놀이짱’이 좀더 일상적이고 공동의 자원이 될 거점을 찾아 빈 곳을 물색하다가 석유비축기지 내 버려진 관리사무소 건물을 발견해 입주했다. 행정 공백으로 관리 주체가 없던 벽돌 건물을 비공식 점유하면서 활동을 시작했다.

대안교육공간 민들레사랑방, 디자인스튜디오 노네임노샵과 함께 운영한 땡땡시장은 ‘소유에서 공유로’, ‘소비에서 생산으로’, ‘돈보다 사람’이라는 가치를 실험하는 장이었다. 목공도구, 재봉도구와 자투리 재료들을 들고 나와 나눠 쓰는 가게, 빌려주는 가게, 고쳐주는 가게, 아는 만큼 가르쳐주는 가게 등을 열었던 경험을 살려 공공제작소를 만들었다. 폐허였던 건물을 청소하고 전기와 수도, 통신을 연결했다. 2011년 벽돌건물 공방 옆 노지에 ‘명랑에너지발전소’라는 이름으로 어른들을 위한 비밀기지를 열었다. 덤불을 걷어내 텃밭을 만들고 야외에서 식사하고 회의할 수 있는 공간도 만들고 사람들을 초대해 워크숍도 하면서 모습을 갖춰갔다.

상암동 옛 석유비축기지 땅

12팀 모여 자치공동체 형성

목공ㆍ농사 등 자립 프로그램

7년간 운영, 1만여 명 참여

문화로놀이짱의 아지트가 여러 주체들의 ‘비빌’ 기지로 확장된 것은 2년 전인 2014년 10월, 서울시가 석유비축기지 공원화 계획을 발표하면서부터다. ‘마포 석유비축기지 재활용 사무소 라운드 테이블’이라는 이름으로 비빌기지 구상이 시작됐다. 시민참여형 공원 만들기를 상상하며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 ‘푸른도시국 비밀기지 비밀요원’을 자처하며 활동하다가 비빌기지에 합류했다. 공용제작소를 운영하는 달바목공, 공유도서관을 운영하는 라라미디어, 도시농부시장을 만드는 마르쉐@친구들, 개인 중심 수공예 생산자들의 소생공단, 비빌기지를 설계하고 조성한 생활건축연구소 홍윤주, 도시텃밭을 가꾸는 자란다,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의 맥주 만들기 팀 효자맥주, 인디레이블 카바레사운드 등 홍대 앞에서 10~20년 간 자생적으로 활동하며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기, 다르게 살기를 탐색하던 사람들이다.

공원화 공사가 한창인 마포 석유비축기지 내 비빌기지 전경. 컨테이너 건물과 야외 공터에서 자립을 실험해 왔다. 고영권 기자youngkoh@hankookilbo.com

비빌기지라는 이름은 비빌 언덕이란 뜻과 비빔밥처럼 섞이고 어울린다는 뜻을 갖고 있다. 공유, 생산, 자립, 협력을 지지하며 모인 입주 팀들은 느슨한 연대의 자치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외부 지원 없이 운영하면서 지속가능 기금을 모아 자립을 모색하고, 청소 등 필요한 일을 나눠서 하고, 2주에 한 번 자치회의를 열어 활동을 기획한다.

비빌기지를 설계한 건축가 홍윤주씨는 비빌기지를 지탱한 에너지를 ‘맨땅에 헤딩’하는 정신이라고 말한다. 먹을 거리, 놀 거리, 살 거리 하나 없는 휑한 곳에 들어와 하나에서 열까지 손수 만들고 일궜다. 지금의 비빌기지에 자리잡은 10여개의 컨테이너 공간은 지난해 3월부터 멤버들과 3개월 간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서 조성한 것이다. 허름해 보여도 구석구석 손때 묻지 않은 곳이 없고 손노동으로 하나하나 만들어낸 땀과 정성이 배어 있다.

다른 삶을 꿈꾸는 이들의 일터이자 놀이터, 생산기지로서 비빌기지는 공적 공간을 점유해 자립 생태계를 만들려는 시도를 해 왔다. 도시 한복판에서 벌이기에는 무모해 보이는 실험이지만, 그동안 많은 일을 벌였다. 목공 등 자립을 위한 생활기술 워크숍, 칼ㆍ시계ㆍ옷ㆍ장난감ㆍ자전거 등 다양한 물품의 수리병원, 어린이와 청소년 캠프, 텃밭 농사와 수확, 먹을거리 채집 소풍 등 7년 간 500여 개의 프로그램을 펼쳤다. 버려진 공간에서 함께 만들고 먹고 놀고 배우며 공유지를 공유지답게 사용하는 방법을 탐색하는 이들의 모험에 지금까지 1만여 명이 참여했다. 비빌기지는 그렇게 시민이 주도적으로 만들고 자발적으로 운영하는 유형무형의 문화자산으로 자리잡았다.

이전과 시즌2… 실험은 계속된다

비빌기지는 이전을 앞두고 있다. 석유비축기지 공원화 공사를 이유로 2015년 1월 서울시로부터 퇴거 명령을 받았다. 그때부터 행정 당국을 설득하는 긴 협의 끝에 이전이 확정됐다. 비축기지 내 다른 장소로 간다. 컨테이너 공간을 옮겨 재배치하는 작업이 내년 초 시작돼 2월 말까지 마무리될 예정이다. 새 부지는 마포구 사회적경제네트워크에 속한 팀들도 함께 쓰게 된다.

서울시의 공원화 계획에 따라

비축기지 내 다른 장소로 이전

“지금과 같은 자율성 보장될까”

재배치 앞두고 깊어지는 고민

서울시 계획에 따라 석유비축기지는 시민들을 위한 문화비축기지로 거듭날 예정이다. 하지만 이 곳에서 7년 간 활동하며 대안적 삶의 에너지를 비축해 온 비빌기지의 역량을 온전히 품게 될지는 미지수다. 하나의 장소가 사라지면 그곳에 형성된 공동체도 흩어지면서 공간의 역사까지 사라진다. 비빌기지는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공터라서 가능했던 실험과 상상의 공동체 공간이다. 시가 관리하고 운영하는 공원의 일부가 되면 예전 같은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비빌기지 주민들이 가장 염려하는 것이 이 부분이다.

. 비빌기지 단수 6개월 만인 2015년 6월 수도가 연결돼 텃밭에 물을 주고 있다. 물을 길어다 쓰는 고생을 이때야 겨우 면했다. 안연정 제공

안연정 문화로놀이짱 대표는 ”마포에서 10년 이상 살았지만,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느끼기는 비빌기지가 처음”이라며 “물리적 점유보다 중요한 것은 공동체성”이라고 강조한다. 그가 원하는 비빌기지 형태는 깔끔하게 조경된 공원이 아니라 자유롭게 상상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공터다. 시가 만들어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고 시민은 소비자로 그치는 공간이 아니라, 시민이 주도적으로 여러 활동을 해낼 수 있는 빈 터라야 비로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라해 보이더라도 시민 스스로 운영하고 관리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초라한 게 현실인데 속이려 할 필요가 있을까. 공공기관은 제공자, 공공 공간에 오는 사람은 소비자로 보는 이분법에 반대한다. 이런 식이라면 소비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살 수가 없다. 복지라는 이름으로 배려를 받아야만 하고, 배려는 자존감을 훼손시킨다. 자기 주도적인 삶을 위해서는 자유롭게 상상하고 실험할 수 있는 틈새가 필요하다. 시민주도형 공원에 필요한 것은 임시적이고 유동적인 공터다.”

부동산 개발 논리로 따지자면 도시의 공터를 빈 채로 놔두는 건 어리석다. 땅값이 얼마인데 건물 짓고 시설 마련해서 수익을 올려야지, 텃밭이나 놀이터로 ‘놀리기’엔 아깝다는 계산이 앞서곤 한다.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독일 수도 베를린 도심의 공용 텃밭 프린체신가르텐, 문 닫은 공항의 거대한 부지를 손대지 않고 통째로 개방한 템펠호프 공항공원은 재개발 논리를 물리치고 공유지를 시민에게 돌려준 사례다. 활주로를 따라 자전거를 달리고 연 날리고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공항공원, 시민 누구나 와서 함께 키우고 농사를 배우고 수확한 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으면서 우정과 환대를 쌓는 도심 텃밭은 돈으로 계산하기 힘든 가치를 대변한다.

문화비축기지로 탈바꿈하는 석유비축기지에 그런 공터가 가능할까. 안 대표가 비빌기지에서 꿈꾸는 것은 “도시에서 자기 존엄을 지키며 살 수 있는 틈을 만드는 것”이다. “돈과 소비에 얽매인 삶에서 벗어나 쪼그라들지 않는 마음과 몸의 상태를 만들어보자”고 시작한 일이다. 목공은 자립을 위한 생활기술로 선택한 것이다. 업사이클링은 단순한 자원 재활용이 아니라 지속가능성과 자립을 위한 삶의 태도다. 그 꿈을 향해 비빌기지의 모험은 계속된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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