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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당선작 | 최현진 '두근두근 두드러기'

입력
2017.01.02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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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손목에 두드러기가 솟았다. 쌍기역 모양 이었다.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두드러기가 난 부분을 눈 가까이 가져갔다.

“열라 징그럽네.”

잠깐 내려놨을 뿐인데, 그새 아군 한 명이 머리통에 총을 맞고 피를 흘린 채 누워있었다. 이래서 게임은 손에서 놓으면 안 되는 건데! 짜증이 났다. 왜 자꾸 가렵고 그런담. 나는 엄지손가락을 재빨리 긁고 적군의 머리통을 날렸다.

ㅇㄹ

양손으로 핸드폰 화면을 터치하자마자 엄지손가락에 ㅇㄹ모양의 두드러기가 솟았다. 동그라미와 꼬불한 길 같이 생긴 이건, 리을 같았다. 뭐지? 두드러기는 원래 뭉게구름 모양 같이 나는데. 왼쪽 손목을 다시 들어 보았다. 쌍기역이 아까보다 커진 것 같았다.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왼쪽 손목을 마구 두들겼다. 두드러기가 사라지도록!

ㄲㄲㄲㄲㄲㄲㄲㄲㄲ

“에이씨 이게 뭐야!!”

나는 깜짝 놀라서 침대 밑으로 떨어질 뻔 했다. 쌍기역이, 그러니까 두드러기가 손목을 벗어나 천장에 떠다니고 있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었다. 하나 둘 셋 넷... 아홉 개나 되는 쌍기역이! 난 내려둔 핸드폰을 찾아 게임을 끄고 구글에 ‘날아다니는 두드러기’라고 검색해 봤지만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이어서 ‘글자모양 두드러기’, ‘움직이는 두드러기’ 등으로 검색해 봤지만 꽃가루, 황사 같은 연관 검색어만 뜰 뿐 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내가 신종 바이러스에라도 걸린 걸까? 아니면 희귀병? 나는 마음이 갑자기 시큰둥해졌다. 게임처럼 대테러요원이 돼서 도시에 쳐들어온 테러범들을 원샷원킬로 죽이고 온몸으로 자폭테러를 막다가 멋지게 뒤지는 거였는데.

ㅊㅊㅊㅊㅇㅋㅋㅋㄷㄷ

“아악!!!”

팔뚝과 팔목, 손등으로 치읓, 이응, 키읔, 디귿 모양의 두드러기가 났다. 글자들은 순식간에 퍼졌다. 크고 굵은 것에서부터 작은 글자까지. 온몸에 소름이 끼친 나는 양손으로 팔을 세게 때리며 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팔뚝에 오돌오돌 했던 두드러기가 느껴지지 않자 머리 위가 오싹해졌다. 고개를 들어봤다. 거실 형광등에 치읓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티브이 위에 이응이 고개를 내밀고, 키읔과 디귿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 카메라를 켰다. 이 사실을 알려야한다.

“뭐야, 아무것도 안보이잖아?”

카메라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나는 계속 거실과 핸드폰을 번갈아가며 봤지만 사실이었다. 눈에는 보이지만 카메라로는 잡히지 않는 이건, 어쩌면 귀신일지도 모른다. 글자 귀신!

*

나는 귀신이 득실거리는 집에서 나와 아파트 현관에서 부모님이 올 때까지 앉아있기로 마음먹었다. 혹시 글자 귀신이 밖에까지? 이상한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맙소사. 맞은편 나무에 히읗이 열매처럼 걸려 있었다. 꼭 사과나 복숭아처럼 말이다.

“진짜 헐이다.”

그때였다. 나무에 걸린 히읗이 똥을 싸는 것처럼 부르르 떨더니 히읗 하나, 히읗 둘, 히읗 셋, 넷, 다섯...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나는 히읗이 줄줄이 싸내는 히읗들을 보다가 고개를 숙여버렸다.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아마도 귀신에 홀린 게 분명했다. 밤에 케이블에서 해주는 프로그램처럼 나도 무당이 찾아와 ‘이 아이에게 글자 귀신이 붙었다! 굿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왜 하필 우리 아이냐고 묻는 엄마 아빠에게 내가 미끼를 물어버린 것이라고 설명할까. 난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괴로웠다. 왜 내게!

“이덕후?”

다리 밑으로 운동화가 보였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분홍색 뿔테 안경을 쓴 김명랑이 서 있었다. 5학년 중에서 공부를 제일 많이 하지만 지필평가 점수가 그저그런, 발표도 그저 그런, 달리기도 그저그런, 머리 길이마저도 그저그런. 그저그런 게 많아서 그저그런 김명랑.

“왜 이러고 있어?”

“그저그, 아니. 집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집에 왜 못들어 가는데?”

김명랑이 ‘쎈논술아카데미’라고 적혀진 가방을 현관 바닥에 내려놓으며 물어봤다. 글자 모양 두드러기가 났고, 두드러기에 날개가 달려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하면 ‘게임만 하더니 드디어 미쳤구나!’라고 할 것 같았다. 난 몇 초 생각하다가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글자가 보여.”

“글자는 누구 눈에나 보여. 못.돼.아.파.트. 이건 쎈.논.술.”

김명랑이 내 옆에 앉아 손가락으로 글자들을 하나씩 가리키며 또박또박 읽어나갔다. 그게 아닌데, 마음이 답답했다.

“그건 모두에게 보이잖아 문제는, 너! 저거 보여? 저 나무에 매달린 거 보이냐고.”

나는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히읗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김명랑이 내 손끝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

“흠. 글쎄,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겠지. 하지만 난, 특별히 잘 들을 수 있어!”

김명랑이 턱을 괴며 말했다. 그러더니 비밀 이야기를 하려는 듯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말을 이어갔다.

“나, 사물들이 말하는 게 들려.”

김명랑은 며칠 전, 학원 벽에 달린 선풍기에게 들은 얘기를 전해주었다. 쪽지 시험을 보는 중이었는데 회전 중이던 선풍기가 자기와 눈이 딱 마주치자마자, ‘이상한 나라의 도로시. 이상한 나라에서 나가주세요.’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갑자기 거세진 선풍기 바람에 자기가 도로시처럼 날아갈 뻔한 이야기, 필통을 열었는데 형광팬과 수정팬이 ‘네 잘못이야!’

하면서 싸우고 있었단 이야기, 분홍뿔테안경이 ‘내가 언제 그랬어?’라고 자기에게 따졌다는 등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이상한 나라의 도로시라는 게 좀 이상했지만 오늘은 이상한 게 너무 많아서 이상한 것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날이었다.

“넌 사물 귀신, 난 글자 귀신에게 홀렸구나.”

난 기운 빠진 목소리로 김명랑에게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놨다. 김명랑은 신나는 일이라도 만난 듯 손뼉을 치며 재밌어했지만 난 말하는 중간 중간에도 나무에 매달려서 히읗히읗 웃고있는 글자들이 늘어나진 않을까, 나를 공격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다.

“판타지 책 보면 마법도 꼭 푸는 방법이 있어! 지금은 무슨 글자가 보이니?”

내가 시무룩해하자 김명랑이 명랑한 목소리로 ‘두드러기 글자 귀신’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라며 자기가 읽고 있는 판타지 책을 가방에서 꺼내들었다. 책의 제목은 「두근두근 요 리사」였다.

“두근두근 요리사가 불량 스프를 막 집어넣거든, 맛을 볼 때마다 혀가 조금씩 자라더니 나중에는 돌돌 말아서, 접어서, 어깨에 짊어져야 할 만큼 커진 거야!“

“웩. 징그럽다야.”

“근.데. 요리사가 착한 스프를 넣고 다시 맛을 봤더니, 혀가, 조금씩, 줄어드는 거야!”

김명랑의 눈이 작은 안경테를 비집고 나올 정도로 커져있었다. 듣고 있으니 너무 유치했다.

“그럼 난 뭐, 착한 말이라도 해야 저 글자들이 사라지냐?”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분명 느껴졌다. 무심코 한 말 이었는데, 김명랑과 나 이덕후, 그리고 나무에 달린 히읗들 사 이에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곤 바람에 살랑 나부끼고 있던 히읗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고딕체’로 변신했다. 마치 ‘바로 그거야!’라고 하는 것처럼.

“야 김명랑. 히읗으로 시작하는 말이 뭐가 있지? 헐, 이런 거 말고.”

김명랑에게 말을 하면서 내가 아까 ‘헐’이라고 말했을 때 히읗들이 더 많아진 것이 깨달았다.

멍청한 이덕후! 왜 이제야 알았을까. 김명랑은 명탐정이라도 되는 듯 뿔테 안경을 가운데 손가락으로 슥 올리더니 가방에서 빨간색 노트를 꺼내 펼쳤다.

“하늬바람”

“하늬바람!”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김명랑이 불러주는 단어를 그대로 따라 읽었다. 그 순간 이었다. 히읗 하나가 똥을 쌀 것처럼 부르르 떨더니, 퐁! 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거짓말 같았다.

“훈풍”

“훈풍!”

나는 한번 더 외쳐봤다. 훈풍이라니, 이런 단어가 있기 라도 했었나? 이런 단어를 노트에 적어 다니는 김명랑이 근사해 보였다.

“사라지고 있어?”

김명랑 생각을 하는데 김명랑이 말을 걸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무를 바라보니 히읗 하나가 또 가지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아싸!

나는 명랑이가 불러주는 대로 히읗으로 시작하는 단어들을 또박또박 발음했다. 하늘, 홍당무, 호수, 흰나비, 향수, 해질녘. 다 아는 단어들 이었지만 평소에 쓰지 않았던 단어들 이었다. 최강 게임 레벨을 자랑하는 이 이덕후에겐, ‘해질녘’ 같은 단어를 발음 하는 게 낯설고 오글 거리기도 했지만 명랑이의 목소리로는 좀, 괜찮은 것도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현관에 나란히 앉아 히읗들을 지워나갔다.

ㅎㅎ

“오늘 일은 정말 고마워.”

나는 슈퍼에서 사온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명랑이에게 건네며 말했다. 명랑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스크림 껍질을 벗겼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에는 까만 바닐라 씨앗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다. 내가 한입에 아이스크림을 깨물어 먹어 반토막 내는 사이, 명랑이는 아이스크림을 녹이면서 먹고 있었다.

“야, 근데 훈풍은 무슨 뜻이냐?”

나는 괜히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입에 물고 말을 걸었다.

“첫여름에 부는 훈훈한 바람!”

“오 아는 건 많은 것 같은데.”

난 ‘그저그러냐?’고 구박을 주려다 말았다. 어쨌거나 그저그런, 도로시와 앨리스를 헷갈려 하

는 책쟁이지만, 오늘은 ‘확실한’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명랑이는 내 말이 칭찬인 줄로 알고, 으쓱한 표정을 지으며 녹은 아이스크림을 입으로 베어 물었다. 명랑이의 입가에 아이스크림이 묻었다. 갑자기 입술이 간지러운 것 같았다. 배도 아픈 것 같았다. 아마 차가운 걸 먹

어 그렇겠지, 나는 입술을 긁었다.

ㅅㅅㅅ

이럴 수가, 입술이 두근두근 거려 핸드폰 화면에 비춰보니 아랫입술에 선명하게 ‘시옷’이라고 적힌 두드러기가 올록볼록 솟아오르고 있었다. 명랑이가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흔들며 활짝 웃었다. 내가 삼킨 게 아이스크림인지, 드라이아이스인지 모르게 속이 뜨거웠다. 나는 입술을 오므렸다 폈다 반복했다. 명랑이가 불편한 데가 있느냐고 물었다. 난 입을 뗐다.

“우리 집에 갈래?”

집에는 아직 글자 귀신이 있으니까, 나는 명랑이처럼 예쁘고 고운 글자를 모르니까, 혹시 이 마법은 명랑이가 불러주고, 내가 따라 읽어야만, 그러니까 같이 해야만 풀리는 걸 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그래!”

명랑이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가방을 들었다. 현관 앞으로 훈풍이 불었다. 나는 시옷으로 시작하는 단어들을 떠올려봤다. 사이다, 사다리, 사... 아, 이상한 시옷들이 마음속을 떠다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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