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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시절 지고… 꽃 밟을 일 남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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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시절 지고… 꽃 밟을 일 남았구나

입력
2017.12.07 16:21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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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만의 시집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를 낸 장석남. 창비 제공
5년만의 시집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를 낸 장석남. 창비 제공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

장석남 지음

창비 발행・116쪽・8,000원

장석남의 시를 읽는 건 “그의 언어가 빚는 마음의 풍경 속으로”(문학평론가 강계숙) 들어서는 일이다. 시의 주인공(화자)은 뜬금없이 이런저런 일을 시도하다 돌연 인생의 환한 순간을 기억하거나, 슬픔으로 트인 생을 기억한다. 한데, 그래서 지금 심정이 어떻다는 결론은 애매하다. 이 애매함이 단정한 여운을 남긴다. 화자의 마음을 외부 풍경으로 환치시켜 추억의 공간으로 소묘하는 특유의 말하기 방식은, 장석남을 1990년대 ‘신(新)서정’의 대표 시인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소매 끝으로 나비를 날리며 걸어갔지/ 바위 살림에 귀화(歸化)를 청해보다가 돌아왔지/ 답은 더디고/ 아래위 옷깃마다/ 묻은 초록은 무거워 쉬엄쉬엄 왔지/ 푸른 바위에 허기져 돌아왔지/ 답은 더디고’ (시 ‘소풍’ 전문)

장석남의 여덟 번째 시집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는 등단 30년을 맞은 중견 문인의 변화를 담고 있다. 시집 제목이 변화를 암시한다. 7년 전 전작 ‘뺨에 서쪽을 빛내다’(창비)로 뺨에 비친 노을을, 인생에서 노을을 맞기 시작한 자신을 은유했던 시인은, 이제 자신의 생이 “축복이면서, 동시에 꽃 시절이 갔다는 비극”인 ‘꽃 밟을 일’에 들어섰다고 감지한다.

‘끓인 밥을/ 창가 식탁에 퍼다 놓고/ 커튼을 내리고/ 달그락거리니/ 침침해진 벽/ 문득 다가서며/ 밥 먹는가,/ 앉아 쉬던 기러기들 쫓는다// 오는 봄/ 꽃 밟을 일을 근심한다/ 발이 땅에 닿아야만 하니까’ (‘입춘 부근’ 전문)

5년만의 시집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를 낸 장석남. 백다흠 악스트 편집장 제공
5년만의 시집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를 낸 장석남. 백다흠 악스트 편집장 제공

시인의 오랜 독자라면 시집 첫머리에서 환희가 밀려올 터다. 천상병의 ‘귀천’ 속 구절을 떠올리게 하는 ‘소풍’(1부), 선종에서 깨달음을 뜻하는 ‘한 소식’(2부)에 담긴 여러 편의 수작은 장석남 특유의 화법을 화려하게 펼친다. 평범한 장면들을 쌓고 쌓아 그려낸 ‘큰 그림’에는 꽃 밟을 시기에 들어선 시인의 정서가 섬세하게 담겨 있다.

‘나의 디자인, 이 구성진 디자인/ 궁상각치랑 우 도레미 도레미/ 썰물에 낚시를 드리우고 내 낚시에 끝까지 걸려들지 않던 어린 날/ 참으로 아름답던 다섯 마리 물고기의 유영을/ 나의 방바닥에서 본다// 그러나 오, 다섯켤레의 혀들/ 나는 내 혀가 지은 죄 때문에 내 혀를 끊을 용기는 없었다/ 내 혀는 나를 말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내 혀는 자주 나의 것이 아닌 것/ 내 손이 써나가는 문장을 차라리 내 혀라고 말하고 싶지만/ 세상은 혀끝에서만 머문다’ (‘다섯켤레의 양말’ 부분)

3부 ‘고대(古代)에 가면’에서는 달라진 세계가 확연히 보인다. ‘고적한 말들이 더듬더듬 걸려’(‘대장간을 지나며-古代’)있는 고대는, 시인의 ‘마음 풍경’을 기대한 독자들에게는 다소 낯선 서정으로 다가올 터. 6편의 고대 연작을 통해 자신의 시론을 펼친다. 요컨대 자신의 시는 ‘말이 생기기 이전의 융융한 세계’(시인의 말)를 지향한다는 것. 시인은 말한다.

‘다시 한 살씩 어려지기로 하자./ 말 배우지 않은 어린아이에게로 가자./ 그저 울음으로만 말하는(중략) 아직 멀었어라./ 그 나라까지는’(시인의 말)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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