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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대통령 관리’가 무거운 짐이 된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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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대통령 관리’가 무거운 짐이 된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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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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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동생인 지만씨 부부에 대해 청와대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할 것이라고 했고, 또 그렇게 했다. 앞선 대통령들이 친인척 비리에 정권의 힘이 죽죽 빠졌으니 당연한 일이다. 모든 국민이 주지하다시피 바가지는 엉뚱한 데서 샜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본격화할 때쯤 청와대 말단 행정관 사이에서는 “피보다 진한 물”이라는 농담이 나돌았다.

두 사람의 관계, 특히 대통령 취임 이후 관계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박 전 대통령은 ‘40년 지기’ 최순실을 무한신뢰 했던 듯하다. 탄핵소추 의견서나 최후변론 의견서에 보면 그 일단이 잘 드러난다.

박 전 대통령은 플레이그라운드, 더블루K, KD코퍼레이션을 “공익사업을 하는 유망한 중소기업”, “외국기업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유망한 중소기업”, “공익사업에 적극 기여하는 실력 있는 업체”라며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수석을 통해 대기업들에 소개하고 챙겼다. 그리하여 대기업들과 ‘갑’의 위치에서 거래를 트게 된 이들 업체는 최순실 소유이거나 최씨 지인이 운영하는 곳이다. ‘사익만을 추구하지 않는 우수 중소업체는 정부가 나서서 키워줘야 한다’는 최씨의 조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대통령의 무지함, 순진함은 국가시스템의 엄한 관리를 받아 마땅했다.

만약 안 전 수석이든,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든,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든 대통령 위치에 어울리지 않는 민원 처리 지시를 한 꺼풀만이라도 벗겨볼 자세를 가졌다면 지금과는 사정이 달라졌을 것인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일말의 의심으로 장막을 걷어봤다고 해도 ‘못 볼걸 봤다’는 듯 도로 덮었을 것이다.

이 세 사람은 국회 청문회에서든, 헌법재판소에서든, 검찰에서든 한결같이 최순실을 모른다고 했다. 비선을 알았음직한 여러 간접 정황이 있지만 최씨와의 통화기록이나 대면접촉 증거가 없다. 암흑의 제왕이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 사람’으로 표현된 어느 판타지 소설처럼 이들에게 최순실은 적어도 ‘알아도 모르는 척 해야 하는 사람’이다. 즉, 감히 들여다볼 수 없는 대통령의 사생활 영역이다.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이 헌재 탄핵심판 변론에서 최씨를 일컬어 “공식적으로든 대외적으로든 없는 사람”이라고 충격적인 증언을 했던 것도 그런 맥락이 깔려 있다고 본다. 공식조직에서 하기 어려운 여성대통령의 사생활을 챙기는 숨은 비서로만 여겼을지 모르겠다. 그러니 최씨를 캐는 것은 대통령의 사생활을 건드리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여겼을 터이다.

이 대목에서 한국의 권력사회에 여전한 봉건성을 보게 된다. 지시와 맹종, 심기관리만이 대통령 비서들이 해야 할 일이다. 안 전 수석은 재판 과정에서 박 전 대통령의 지시를 그대로 따른 데 대한 후회의 빛을 가끔 드러내고 있지만 맹성(猛省)의 의지를 엿볼 수 없다.

이제야 끝이 보이는 국정농단이 대통령 개인 문제냐, 권력구조 문제냐를 두고 정치권에서 말들이 많지만 대선을 코앞에 둔 이해타산의 결과로서 뚜렷한 결론이 날 턱이 없다. 그러나 광범위한 인사권과 행정입법권 등으로 인해 권한 남용과 오용의 소지가 무제한 열려 있는 대통령 자리가 부정부패의 무한한 싹을 안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정당 대립이 극심한 우리 실정상 대통령 자신이나 측근, 주변이 부패에 연루되는 순간 정권의 위기로, 나라의 혼란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은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한때 ‘헌법과 법률의 수호자’로 떵떵거리다가 검찰청사 앞에서 “죄송하다”, ”면목없다”, “송구하다”는 말을 되뇌는 일은 앞으로도 반복될 터이다.

대통령 관리가 무거운 짐이 된지 오래된 나라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룰 가망도 없다. 헌정사에 부끄러운 날이 된 21일 ‘대통령 관리’ 문제가 여전히 이 나라의 앞날을 짓누르고 있다.

정진황 사회부장 jhch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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