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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일생 제대로 기록할 것… 민주주의의 불행 반복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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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일생 제대로 기록할 것… 민주주의의 불행 반복되지 않도록”

입력
2017.10.18 17:56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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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운동 거목’ 故박형규 목사

무죄 선고 5년 만에 사업회 발족

아들 박종렬씨 평전 편찬에 착수

15일 오후 인천 동구 자택에서 박종렬 목사가 고 박형규 목사의 저서를 들어 보이며 아버지의 민주화 운동 이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민정 기자
15일 오후 인천 동구 자택에서 박종렬 목사가 고 박형규 목사의 저서를 들어 보이며 아버지의 민주화 운동 이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민정 기자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죄와 벌을 최종 선언하는 법관으로서는, 거대한 파고의 주류적 의견에 묻혀 버릴지도 모르는 보석 같은 헌법적 가치에 늘 주목해야 함을 새삼 교훈으로 얻게 되었다. (중략) 이 판결이 부디 피고인에게 작은 위로가 되고, 우리 사법에 대한 안도로 이어지길 소망한다.”

2012년 9월 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8부(부장 김상환) 재판장이 낮은 목소리로 눌러 읽은 판결문이 박형규(당시 89) 목사 재심 선고공판이 열린 509호 법정을 가로 질렀다. 유신정권 때 군사독재에 맞서 싸우다 긴급조치 위반 등으로 6번 옥고를 치른 박 목사는 이날 고령의 몸으로 법정에 나와 재판장의 진심 어린 위로를 들으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과거사 재심 가운데 검찰과 사법부의 가장 진솔한 사죄가 이뤄진 순간으로 회고되는 날이다.

5년여 만인 이달 19일 박 목사 유가족과 제자들은 박형규목사기념사업회 발족식을 열었다. 군사정권 시절 겪은 고초와 재심 재판 후일담 등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고인의 일생이 담긴 평전 편찬 작업에 착수하기로 뜻을 모았다.

고인의 아들 박종렬(70) 인천주거복지센터 이사장은 17일 인천 동구 자택에서 본보 기자와 만나 “임은정 검사가 무죄를 구형했을 때 심장이 내려앉을 만큼 놀랐다”고 5년 전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당시 공판검사였던 임 검사는 관례대로 백지구형(구형 포기)을 하라는 상부 지시를 어기고 법정에서 박 목사에게 “이 땅을 뜨겁게 사랑하여 권력의 채찍에 맞아가며 시대의 어둠을 헤치고 걸어간 사람”이라고 경의를 표하며 무죄를 구형했다. 박 이사장은 “그날 검사님과 판사님 말씀으로 가족들은 뒤늦게나마 마음 속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정작 검찰은 임 검사에게 품위유지의무 위반 등으로 징계를 내렸다.

1987년 7월 9일 서울 연세대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영결식에 참석했을 당시 박형규(왼쪽부터) 목사와 고 김대중 대통령(당시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고 김영삼 대통령(당시 통일민주당 총재).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7년 7월 9일 서울 연세대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영결식에 참석했을 당시 박형규(왼쪽부터) 목사와 고 김대중 대통령(당시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고 김영삼 대통령(당시 통일민주당 총재). 한국일보 자료사진

40년 가까이 흘렀지만 가족이 겪은 고초는 아직도 선하다. “아버지가 중앙정보부에 잡혀 들어갔다는 소식을 군대에 있다가 신문으로 봤어요. 가족 걱정에 휴가를 신청하니 ‘탈영 위험이 높다’고 내보내 주지 않더군요.” 간신히 휴가를 나왔을 때 집안은 이미 쑥대밭이었다. 내란선동죄로 끌려간 아버지 소식은 알 수 없었다. 박 이사장은 혹여 아들까지 잘못될까 노심초사하는 어머니 만류에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1974년 박정희 정권은 독재 반대 시위를 조직한 학생들을 폭력혁명 기도 반정부조직으로 날조해 ‘민청학련 사건’을 만들었다. 당시 박 목사는 윤보선 전 대통령 자택에서 학생시위를 논의하고, ‘선열의 피로 지킨 조국 독재국가 웬 말이냐’ 등이 적힌 플래카드와 유인물을 배포하려 했다는 혐의로 사건에 달려 들어갔고,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박 이사장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자신의 상처보다 민주화 과정에서 피 흘린 젊은이들에 대한 미안함이 늘 앞서는 사람이었다. “이름이 알려진 아버지는 고문받던 학생들과 따로 분류돼 조사를 받았대요. 그걸 두고두고 미안해 했습니다.” 38년 만에 무죄 선고되던 날에도 박 목사는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한 젊은이들에게 죄스러워 기뻐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생전 ‘길 위의 목회자’ ‘민주주의 산증인’이라 불린 박 목사는 지난해 8월 작고하기 전 가족과 신도들에게 기도를 남겼다. “신뢰, 사랑, 화합으로 살아가는 사회가 되기를” 유지를 받든 박 이사장이 다짐했다. “불행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아버지 일생과 민주주의 역사를 몇 년이 걸리더라도 기록해 책으로 엮어 내겠습니다.”

김민정 기자 fac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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