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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봄날은 간다

입력
2018.05.22 18:36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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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분홍 치마가 휘날린다고? 그런 늙은 유행가가 흥얼거려진다는 것은 내 생도 잔치의 파장처럼 시들해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벚나무 아래서 만났던 첫사랑. 그 소녀의 허리도 이 나무 몸통처럼 굵어졌을 터다. 터질 것처럼 뛰는 가슴을 가졌던 열일곱 나도 없다. 돌아보면 화무십일홍. 잔치도 끝나기 전에 꽃이 날린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삶에 그냥 스쳐 지나가는 구경꾼일 뿐이다. 그렇게 시들시들 내 생의 봄날은 간다. (정일근)

봄날 느티나무 아래 행인들이 모였다. 악사는 노래를 연주한다. 손자에게 목욕가방을 맡긴 할머니가 마이크를 받았다. “잘 부탁합니다. 허명순입니다”에서 꿀 먹은 할머니는 연분홍 치마를 놓치고 놓쳐 아코디언 반주만 봄날은 간다. 복사꽃잎은 흩날린다. 어찌야 쓰까이 요로코롬 피어부러서. (박성우)

낯선 도시 노래방에서 봄날은 가고 있다. 손님 없는 노래방에서 술에 취한 봄날이 간다. 안개도 가고 왕십리도 간다. 기차는 가지 않는다. 글쟁이, 대학교수, 만성 떠돌이, 우울한 이론가, 당신은 남고 봄날은 간다. 나도 남고 봄날은 간다. (이승훈)

# 이 봄이 빗속에 꽃상여로 떠나는 창밖을 바라봅니다(유종인). 꽃잎과 꽃잎 사이 아무도 모르게 봄날이 가고 있습니다(안도현). 손톱에 낀 때같이 봄날이 갑니다(서상영). 체중은 줄지 않고 누구의 안부도 간절하지 않습니다(이재무). 미쳤습니다. 처음으로 사내 욕심이 나서 사내 손목 잡아끌고 초저녁 풋보리잎을 쓰러뜨렸습니다(김용택). 꽃이 집니다. 세상일 마음 같진 않지만 깨달음 없이 산다는 게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지요(김종철). 그러고 보니 당신이나 나나 너무 오래 살고 있군요(김소연). 이렇게 다 주어버립시다, 꽃들도 지고 있는데. 이렇게 다 놓아버립시다. 지상에 더 많은 천벌이 있어야겠습니다(고은).

가장 많은 시인이 같은 제목의 시로 헌정한 노래. 아마도 ‘봄날은 간다’일 겁니다. 제가 찾아낸 시만 해도 이렇게 십수 편입니다. 난다 긴다 하는 당대의 가수들이 자기만이 절창이라는 듯 불러 젖혔듯이요. 그런데 손로원 선생께서 ‘봄날이 간다’가 아니고 ‘봄날은 간다’라고 제목을 붙인 건 참 잘 한 거 같습니다.

제가 (사람 좋은 시인들께서 당연히 용서하리라 믿고) 제 마음대로 원작을 중간중간 자르고 산문체로 변형해 짜깁기를 했습니다. 순전히 저의 치기입니다. 이팝나무 그늘 아래 찔레꽃잎 띄운 낮술에서 깨고 나니 입안에서 뱅뱅 맴돌던 언어가 일장춘몽이 돼버렸습니다. 마감 시간은 다가오는데 족탈불급 아무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공개적으로 시 도둑질을 했습니다.

그런데 시들이 한결같이 서럽습니다. 가는 봄이 뭔데 마치 삶에 달관한 척합니다. 압니다. 봄은 애시당초 가기 위해 오는 거라고. 세상 모든 아름다운 건 영원히 머물지 않는다, 스쳐갈 뿐이다, 그걸 말하려고 봄이 왔다 후딱 가는 거라고요. 봄이 오면 이미 봄이 아니죠. 사랑처럼요.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요? 사랑이 다가온 순간, 이별은 벌써 다른 한 손으로 악수를 청하고 있죠.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성황당 길에 앙가슴 두드리며 알뜰한 그 맹세를 기다리지만, 그거 다 실없는 기약인 거 압니다. 봄은 무심히 가고 나만 속절없이 남습니다. 배신의 정표 같습니다. 내 가슴을 들킨 듯, 네 입술을 들킨 듯합니다. 짐짓 아닌 체 모른 체하지만 철리를 훔쳐본 듯합니다.

잔치는 끝났습니다. 저는 그냥 이대로 청승맞게 시시껄렁하게 봄을 보내려 합니다. 당신은 이 봄을 어떻게 배웅하십니까. “봄날이 가면 그뿐 아닌가요?” (기형도, 그는 스물아홉 어느 이른 봄날에 떠났습니다.)

한기봉 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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