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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칼럼/11월 20일] 화가 가득 찬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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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인 칼럼/11월 20일] 화가 가득 찬 사회

입력
2013.11.19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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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퇴근길 거리에 나서면 늘 가슴이 묵직해진다. 한국인 특유의 딱딱한 인상 때문일까? 혼자 걷는 행인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굳었다. 대개 건드리면 금세 눈썹을 치켜 올릴 듯한 표정들이다. 실제로 무심히 눈 마주치다 "뭘 봐!"투의 적대감이 느껴져 당황한 경험이 한두 번쯤은 있을 것이다. 여느 나라들에서처럼 가벼운 목례라도 나누진 못할지언정. 초겨울의 음산한 날씨 탓인가? 행인들의 표정은 더 굳고, 거리는 더 어두워졌다.

택시를 타면 자주 원치 않는 대화에 휘말린다. 유쾌하거나 긍정적인 얘기를 들어본 기억은 별로 없다. 시국이나 일상에 대한 개탄에서 시작해 급기야 분노로 치닫기 십상이다. "차츰 좋아지겠지요." 건성 맞장구를 치면서도 이미 화에 전염된 마음이 편안할 리 없다.

뉴스를 접해도 마찬가지다. 내 편 아니면 곱게 봐주는 법이 없다. 큰 눈으로 보는 평가나 판단 대신, 매사 한 귀퉁이라도 비틀어야 직성이 풀리는 듯한 기사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신중하면 늑장, 신속하면 졸속'식이니. 비판의 외피를 쓴 무조건적 적대다. 예전 경찰기자 때 썼던 '사건 발생 24시간이 지나도록 범인의 윤곽도 잡지 못하고 있다'는 따위의 상투적 기사 투를 떠올리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입시제도를 비롯해 숱한 정책들이 널뛰는 것도 이런 '비판적' 언론문화와 무관치는 않을 것이다.

인터넷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일베'처럼 아예 배설 마당이야 그렇다 쳐도, 평범한 기사에 붙는 댓글이나 여러 블로그 등에서 오가는 글들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익명에 기댄 가장 솔직한 감정표출공간일진대, 그 섬뜩한 적개심이나 머리 끝까지 차오른 분노, 증오를 보면 공동체가 유지되는 게 희한할 지경이다.

우리 사회가 온통 화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이다. 모두가 서로에게, 자신을 제외한 거의 모든 대상에 잔뜩 화가 나있거나 화를 낼 준비가 돼있다. 아니, 국회의원이 거슬린다고 공무차량에 함부로 발길질을 해대고, 또 그렇다고 해서 공무원이 국회의원의 목덜미를 쥐 잡을 일인가. 서로에게 평소 부글대는 화가 없었다면 애당초 생길 일도 아니었다. 지극히 한국적인 풍경이다.

전 같으면야 못 살아 각박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어떤 경제지표 상으로도 선진국 반열에 들어서있다. 빈부격차도, 사회경직성도 아직은 비교적 낮은 편이다. 그런데도 행복도는 늘 전 세계 밑바닥권이다. 화 때문이다.

아마 역사적, 문화적 측면에서 전쟁을 통해 체화된 생존ㆍ경쟁욕구에다 이후 개발과정에서 기회와 성취의 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합쳐진 때문은 아닐까? 또 오랜 권위주의 체제의 해체와 함께 욕구의 분출, 그로 인한 사회경제적 기대치의 상승, 그러나 미처 그에 상응치 못한 현실도 집단적 화를 돋운 원인일 것이다.

어쨌든 화는 이성을 떠난 영역이다. 우리사회의 갈등과 대립이 합리적 해결과정을 밟지 못하고 번번이 격한 감정적 적대로 파괴적 결말을 내는 이유다. 현실이 화의 원인이되, 화를 치유하지 못하면 현실을 바꿀 수도 없는 악순환에 빠진 셈이다. 그러므로 화를 누그러뜨린 담담한 이성의 회복이 가장 빠르게 세상을 바꾸는 길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2,000년 전 로마의 철인 세네카가 를 썼다. 핵심은 한마디로 "난 잘못한 게 없다"는 인식이 화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심리학의 연구결과도 다르지 않다. 그래서 세네카나 틱낫한의 해결책은 같다. 화날 때면 거울을 찬찬히 들여다 보라고. 자신의 화난 표정을 보고, 화난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래서 화의 원인이 대부분 스스로에게 있음을 깨달으라고. 행여 이 말을 잘못된 현실을 그냥 받아들이라는 뜻으로 곡해하진 않기 바란다. 그 또한 공연한 화를 키우는 일이 될 터이므로.

엊그제 첫눈까지 왔으니 곧 세밑이다. 그러니 다들 이제부터라도 화를 조금씩 내려놓고, 마음을 온유하게 다스리면서 한 해를 정리해보는 건 어떨지.

이준희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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