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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장관'이길 바라는 최경환의 가을 편지

입력
2014.10.31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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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패티김 가을편지)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노래가사처럼 가을에 편지를 띄웠습니다. ‘그대’는 최 부총리 표현에 따르면 “우리 직원”입니다. 자신도 “우리 장관”이라 불리길 바란다는 염원을 담아.

사실 거의 대부분의 기재부 직원은 최 부총리를 “우리 장관”이라고 호칭하지 않습니다. “현 부총리”나 “지금 부총리”, 그도 아니면 그냥 “최 부총리”라고 합니다. 몇 십 년 한 조직에서 일하는 공무원 입장에서 길어야 1, 2년 머무는 부총리나 장관에게 “우리”라는 살가운 호칭이 입에 붙을 리가 없죠.

최 부총리의 편지는 취임 100일(23일)을 맞아 최근 기재부 내부통신망에 올린 글입니다. 취임 이후 정책을 평가하고 직원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한편, 앞으로 더 잘하자는 내용입니다. 직원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고 하네요.

대외적으로 자신감 넘치는 최 부총리의 모습과 달리 나름의 반성도 눈에 뜁니다. “국민에게 존재감 있는 성과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부족했던 것이 사실” “정말 제대로 가고 있나 갸웃하며 발 밑을 다시 볼 때도 있고” “잘 해낼 수 있을까 중압감이 있는 것도 사실” 등.

어설픈 설명보다 200자 원고지 10매 남짓 분량의 편지를 직접 읽어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기재부 직원들은 못하더라도 국민들은 “우리 부총리”라고 부를 날이 오길 바라며.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연합뉴스.
연합뉴스.

사랑하는 기획재정부 직원 여러분

국정감사 치르느라 고생들 많았습니다.

지난 일요일에도 출근해서 질문지를 입수하고 답변을 썼겠지요.

취임 후 여러분이 일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본 뒤로는, 이른 아침에 제 책상에 올라오는 보고서 한 장 한 장이 허투루 보이지 않습니다. 특히 일상화된 야근과 주말 근무에 대해 “우리가 언제는 안 그랬느냐”며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 더 안쓰럽습니다.

그래서 취임하자마자 여러분과 토론을 거쳐 서면보고 활성화, 국회 대기 제한, 보고용 출장 자제 등을 담은 업무 효율화 지침을 마련했는데, 체감도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일 우선’행동양식이 체질화된 기획재정부 조직문화를 생각하면 첫술에 배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일이란 게 지금 잘 안 되는 것에 대해 ‘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니만큼, 함께 노력해 봅시다.

사무실에 들러 손을 잡고 어깨를 두드리고 싶은데 형편이 여의치 않아 우선 이렇게 편지로나마 마음을 전합니다. 늘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여러분과 호흡을 맞춘 지도 어느새 100일이 넘었습니다. 한 달이나 100일 등의 시간 구분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이지만, 국정감사나 언론에서 100일 평가가 여럿 나온 김에 ‘현재의 좌표와 그간의 궤적’을 찬찬히 복기해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100여일 전 취임사에서 여러분에게 우리경제가 빠진 세가지 함정을 이야기 하고, 변화를 주문하고, 발상의 전환을 당부했습니다. 고맙게도 여러분들은 우리 경제에 대한 저의 위기의식을 빠르게 공유하고, 이를 팽팽한 긴장감으로 살려냈습니다. 현실을 반듯하게 진단했고, 일치된 상황인식을 통해 경제정책방향을 새롭게 설계했습니다.

대전환이었고,‘지도에 없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경제정책방향을 내비게이션 삼아 세법, 예산, 사적연금, 부동산, 장년?여성 일자리, 자영업, 공공기관, 서비스업 등 경제 전반에 걸쳐 속도감 있게 정책을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 좋은 출발입니다.

굳이 자평하자면, 100일간 쑥만 먹었던 곰처럼, 저와 여러분도 좌고우면하지 않고 우리경제의 전열을 근본적으로 재정비하는 데에만 전력투구했다고 생각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저와 여러분이 만든 정책에 시장이 반응하고 있습니다. 경제주체들 사이에도 “이번엔 뭔가 좀 될 것 같다”는 심리적 훈풍이 부는 조짐입니다.

직원 여러분

그러나 경제가 좋아진다는 것은 결국 국민들의 먹고 사는 형편이 나아진다는 것입니다. 단순하고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는 지난 100일간 ‘일’을 했을 뿐, 국민에게 존재감 있는 ‘성과’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부족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자동차로 치자면, 이제 겨우 우리경제에 시동을 건 수준일 것입니다. 연료를 제때 공급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방전되겠지요.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민생법안을 비롯해 세법개정안과 예산안, 기업의 투자 등이 바로 이런 동력 공급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입법 여건은 법안 통과가 마치 낙타 바늘구멍 통과하듯 어렵습니다.

투자와 소비 등 경제심리도 아직은 많이 보강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더해 대외 여건은 빠르게 나빠지고 있습니다. 우리경제는 지금 안팎으로 코가 석자인 셈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집중력과 긴장감을 주문합니다. 우리가 만든 경제활성화 정책의 원활한 작동, 경제법안들의 조속한 입법, 대외 리스크 관리 등을 여러분 업무의 우선순위에 놓아주십시오. 특히 “어려울 때일수록 미래에 투자하라”는 말처럼, 공공·노동·금융·교육·서비스 등 5대 부문 구조개혁에 속도를 낼 시점입니다.

우리 기획재정부 직원 여러분

사실 지도에 없는 길이 쉬울 리 없습니다. 부총리인 저로서도 “정말 제대로 가고 있나” 갸웃하며 발 밑을 다시 볼 때도 있고, “잘 해낼 수 있을까” 중압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매 순간마다 여러분의 판단을 최우선적으로 신뢰합니다. 그 다음에는 바깥의 전문가·언론·정치권 등을 통해 돌다리 두들기듯 좌표를 확인하고, 확신이 선 뒤에 신중하게 한발 한발 내딛고 있습니다. 멀고 험할지라도 서로를 격려하며 의연하게 항해합시다.

마지막으로 저는 경제도 마찬가지지만 우리가 일하는 조직도 서로에게 살가워야 신나는 일터가 되고, 그 신명을 자양분 삼아 경쟁력이 커진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핑계 삼아 일체감·소속감에 대한 저의 소박한 욕심을 한번 드러내 봅니다.

“제게 여러분이 ‘우리 직원’인 것처럼, 여러분에게도 제가‘우리 장관’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14.10.29 최경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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