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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홍사익 (2.2)

입력
2018.02.02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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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육군 장성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홍사익이 1887년 오늘 태어났다.
일제의 육군 장성으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홍사익이 1887년 오늘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친일 관료 민원식과 박중양, 작곡가 손목인, 독립운동가 이봉창 등의 삶을 되짚어보다 보면, 1900년대 전반기 한국인에 대한 친일-반일-항일의 분류가 생각처럼 쉽지 않고, 어느 만큼 의미를 부여하는 게 합당할지 곤혹스러워진다. 바뀐 세월 탓도 있겠지만 강점기라는 시대적 맥락 안에서 보더라도, 선악 이분법이 개인의 삶의 총체를 담지 못하고 가혹하고 폭력적이라는 느낌도 든다.

홍사익(1887.2.2~1946.9.26)의 삶도 그런 경우일 것이다. 그는 조선인으로 제국군대의 육군 중장을 지낸 엘리트 군인이었다. 그는 강점기를 통틀어 조선인 딱 4명이 졸업했다는 일본 육군대학을, 영친왕 등 특전으로 입학한 3명의 왕족을 뺀다면 사실상 유일하게 실력으로 입학했고 졸업했다. 일본 육사 졸업 후 최고 엘리트 부대였다는 도쿄 1사단 1연대를 시작으로, 그는 본토 사령부와 참모본부, 교육ㆍ훈련부대에서 주로 근무했다.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중국 전선의 보병 여단장으로 나가 팔로군 및 조선의용대와 전투를 벌였고, 태평양전쟁 직후에는 필리핀 주둔군 총사령부 병참총감으로, 연합군 포로수용소 소장으로 약 10개월을 근무했다. 종전 후 그는 수용소장 시절 포로에 대한 불법 처우와 학대, 살해 등 혐의(B급 전범)로 사형 당했고, 66년 저 악명 높은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됐다. 그는 친일파를 넘어 ‘악질’ 전범이었다.

그는 일본육사 조선인 동기들이 만주로 건너가 광복군이 된 뒤 그들 가족을 보살폈다. 광복군 사령관이 된 지청천의 합류 종용에도, 전쟁 말기 한 조선인 종군기자의 탈영 제의에도, 그는 응하지 않았다. 일본에 대한 의리 때문이 아니라, 수십만 명의 징병ㆍ징용 조선인들의 처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다. 영국의 아일랜드인처럼 조선인도, 당장엔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동등한 국민으로 권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 믿었고, 그러기 위해서라도 누구나, 언제나, 자신이 조선인임을 밝혀야 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그는 독립군과 맞서 싸운 일본 군대의 장군이었지만, 그 길이 조선인의 권리 회복에 도움이 되는 길이라 여겼다. 그는 축재하지 않았고, 전범 재판정에서도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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