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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포도나무를 직접 심자”

입력
2018.01.19 15:02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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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부터 감기약을 먹지 않는다. 특별히 자연주의 치료법을 신봉해서는 아니다. 체력이 떨어진 탓인지 마흔 넘어서부터 환절기마다 감기에 걸려 병원 신세를 졌다. 병원에서 조제해 준 약을 사나흘 먹으면 차도가 있었지만 후유증이 만만치 않았다. 제일 불편한 건 약에 취해 몇 날 며칠 아득한 정신으로 일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감기 증세가 호전될 즈음부터 일주일 넘게 지속되는 두통과 메슥거림을 견디는 것도 몹시 고통스러웠다. 몇 번이나 이 문제를 두고 의사와 상담했지만 약으로 인한 부작용은 아니라는 말이 돌아왔다. 기력이 쇠한 데다 과로와 갱년기 증상이 겹쳤을 수 있다고 했다.

이래저래 답답하고 기분까지 잡친 나는 쉰 살을 코앞에 둔 3년 전 중대 결단을 내렸다. 더 나이 들기 전에 병원에 너무 의존하지 않는 습관을 들이기로 작정한 것이다. 우리 사회 허리세대로서 가뜩이나 아슬아슬한 건강보험 재정에 부담을 더하지 말자는, 알량한 자존심 한 조각까지 슬쩍 얹었다. 의사 선생님이 들으면 코웃음 치시겠지만, 나에게 착 감기는 처방전도 찾아냈다. 끓인 포도주, 흔히 ‘뱅쇼(VinChaud)’라고 불리는 음료를 만들어 마시는 거다. 프랑스어로 뱅(Vin)은 ‘와인’, 쇼(Chaud)는 ‘따습다’는 뜻이니 우리말로 ‘데운 술’쯤 되겠다.

인터넷에 떠도는 제조법과 오래 전 유럽여행 때 한 번 마셔 본 기억을 떠올리며 나만의 레시피 개발에 착수했다. 마트에서 제일 싸게 파는 적포도주 1,500㎖를 큰 냄비에 부은 뒤 사과와 귤, 레몬에다 냉동실에 오래 처박혀 있던 말린 살구와 열대과일까지 잘라 넣었다. 계피와 생강은 아낌없이 투척하고 여기에 평소 멀리하는 설탕, 그것도 흑설탕을 내 혀가 맛있다고 느낄 때까지 들이붓고는 약한 불에 한 시간쯤 부글부글 끓였다.

와인의 알코올이 빠져나오고 달짝지근한 과일주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할 즈음, 한 국자 떠서 맛을 봤다. 기가 막혔다. 끈적한 과일즙과 비슷해진 이 음료에서는 묘하게도 오래 전 미국 사는 고모가 사다 줬던 넥타 맛이 났다. 넥타(nectar)로 말하자면, 그리스 신화에서 신들이 즐겨 마셨다는 불로장생의 신묘한 음료 이름이 아니던가. 만약 신화 속의 과실주가 이와 유사한 맛이었다면 세월아 내월아~ 사시사철 술에 취해 인간사를 저들 맘대로 휘둘렀겠군,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는 이 음료를 ‘넥타’라고 부르기로 했다.

플라시보 효과인지 아니면 효능이 나에게 맞은 것인지, 이렇게 끓여 낸 넥타를 사나흘 마시고 습도 조절만 잘 해 주면 감기가 떨어졌다. 살짝 남은 알코올로 인해 알딸딸해지는 상태 역시 약에 취할 때의 늪에 빠진 듯 몽롱한 기분과는 많이 달랐다. 에너지가 넘치는 유쾌한 고양감이랄까? 철철이 앓던 몸살감기가 뜸해지면서 나는 피로하거나 기분이 안 좋을 때도 넥타를 만들어 마셨다.

이 좋은 걸 나 혼자만 알기 아깝다는 생각이 찾아들 즈음, 주변을 둘러보니 팔랑귀들이 수두룩했다. 나는 그들에게 속닥거렸다. 감기와 과로에 좋은 나만의 비전(秘傳)이 있다고. 착한 그들은 의심 없이 내 말을 믿었다. 직접 체험한 뒤 고마움을 전하는 이도 여럿이었으나 한편에서 슬슬 다른 소리가 흘러나왔다. “병원 약 5,000원어치 먹으면 나을 몸살감기인데 넥타를 만들려면 최소한 2만원은 들어간다. 게다가 집 주변에 와인 싸게 파는 가게도 없으니 정 그 방법을 권하려거든, 몇 병 선물해 주든가…” 나보다 나이 어린 혈육들이 걸어오는 클레임이었다. 그때 큰언니가 불쑥 나섰다. “포도나무를 직접 심자. 우리 먹고 포도주 담글 만큼만 수확하면 되잖아.” 흐흐! 드디어 나보다 더 무모한 넥타 신봉자가 납셨구먼. 뜻대로 됐다. 이제 내게 남은 건 내년 늦가을 잘 익은 포도를 수확하러 가는 일이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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