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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자들 감형 노리고 ‘꼼수 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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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자들 감형 노리고 ‘꼼수 기부’

입력
2018.06.01 04:4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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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단체 후원 영수증 내면

재판서 형량 감경 사유로 인정돼

단기간만 거액 기부 사례 늘어

감형 참작되면 바로 후원 끊고

형량 안 줄면 “돌려달라” 항의도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가 지난해 9월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집회를 열고 "성폭력 가해자의 후원을 감경 요인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제공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가 지난해 9월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집회를 열고 "성폭력 가해자의 후원을 감경 요인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제공

“100만원 기부금 낸 후원자가 성범죄 피의자더군요.”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최근 고액 기부금을 낸 남성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일시 후원으로 100만원을 낸 직후 기부금 영수증을 달라는 요구에 의심을 품고 확인해보니 성범죄로 재판 중인 피의자였다. 조금이라도 낮은 형량을 받기 위해 여성단체에 ‘꼼수’ 기부를 한 것이다. 이 돈은 즉시 반환됐다. 이 소장은 “고액 기부금 후원자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는 일이 업무가 돼 버렸다”며 “선의로 기부하는 사람마저 의심하게 된다”고 씁쓸해했다.

형량을 낮추기 위해 여성단체에 꼼수 기부하는 성범죄 피의자가 늘고 있다. 여성단체는 이러한 기부가 모금 목적에 배척되는 것이기에 완강히 거부하고 있지만, 후원자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꼼수 기부는 여성단체 입장에선 고질로 꼽힌다. 단기간에 후원금 수백 만원을 낸 성범죄 피의자가 재판 과정에서 후원내역을 양형 자료로 제출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범죄 가해자 인터넷카페에는 ‘양형 자료로 여성단체 기부 내역을 제출했다’고 밝힌 글이 여러 건 올라와 있다. 일부 성범죄 전담 변호사는 여성단체에 연락해 “피의자 10명을 후원자로 만들어 줄 테니 기부금 영수증을 발급해달라”고 회유하기도 한다. 심지어 “아들이 성범죄 재판을 받던 중 변호사 조언으로 입금했는데 형량이 안 줄어들었다”고 한국여성민우회에 냈던 후원금 900만원을 돌려달라 항의한 남성도 있다.

꼼수 기부를 가려내는 건 어렵다. 의심되는 액수의 기부금이 들어오더라도 누가 보냈는지 추적하는 데 한계가 있어서다. 기부금을 담당하는 선민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최근에는 여성단체 후원계좌로 수백 만원을 입금한 뒤 통장 내역을 법원에 제출한다”라며 “이 경우 후원자 연락처조차 알 수 없어 기부금을 돌려줄 수 없다”고 말했다. 기부금 영수증 제공이 의무인 점을 악용해, 기부금 돌려받기를 거부하며 영수증을 발급해주지 않으면 고발하겠다고 으름장 놓는 성범죄 피의자도 있다.

이런 꼼수 기부는 실제 재판에서 도움이 되기도 한다. 서울동부지법은 지하철 승강장에 서 있는 여성을 휴대폰 카메라로 몰래 촬영해 재판에 넘겨진 A씨에게 2015년 6월 2심에서 선고유예를 내린 바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정기후원금을 납부하면서 다시는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는 점 등이 참작된 것이다. 실제로도 A씨는 재판 중이던 2014년 10월부터 매달 10만원씩 정기후원을 했다. 그런데 2심 판결을 몇 달 앞두고부터 후원을 끊었다.

여성단체는 법원이 꼼수 기부를 양형 자료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는 “일시적 후원을 성범죄 재판의 양형 감경 사유로 반영해서는 안 된다”라며 “재판부에서 면밀하고 엄격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법원 소속 양형위원회는 지난해 10월 “여성단체 기부 사실을 피의자에게 유리한 양형 요소로 삼을지에 대해 앞으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강진구 기자 realn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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