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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오키나와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

입력
2016.02.26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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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이 발표되었던 1987년, 일본현대문학사에 또 하나의 중요한 신인 작가가 나타난다. 리비 히데오라는 유대계 미국인이자 스탠포드 대학 교수가 도쿄(東京)로 이주해 소설을 펴낸 것이다. 일본어가 모국어가 아닌 그의 일본어 작품들은 주요 문학상을 수상하며 화제를 일으켰다. 데뷔작 ‘성조기가 들리지 않는 방’은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처럼 1968년 전공투 시위, 70년의 미일 안보조약 체결 반대 시위, 베트남 반전시위가 복잡하게 얽힌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로서,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주요거점이었던 요코하마(?浜)의 미국영사관, 미 영사의 아들이 주인공인 소설이다.

1980년대 말의 최대 화제작인 두 작품의 공통점은 학생 시위를 배경으로 하지만 주인공들은 운동과 거리를 두는 입장을 취한다는 것이다. ‘노르웨이의 숲’은 주인공의 연애 서사가 주된 모티브이고, ‘성조기가 들리지 않는 방’은 신주쿠(新宿)라는 공간을 통해 미국(민)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국적과 인종이 또 다른, 자신의 정체성 찾아가는 일종의 탐색담(Quest story)이다.

필자는 이 소설들이 탄생한 1987년이라는 시기에 주목한다. 당시 일본은 미국을 능가하는 세계 최대의 경제 대국으로 떠오르면서, 2차 대전 승전국 미국과 패전국 일본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듯했다. 버블경제라고도 불리던 이 호황기에, 문화의 첨단인 소설의 생산자와 소비자는 대미종속과 이에 따른 미국에 대한 저항의 기억이 강하게 각인되었던 1960년대 말을 소환하여 치유하려 한 것이다. 즉 세계 최고로 부유한 일본에 사는 독자들은 1960, 70년대 일본의 대미 종속을 과거 완료형으로 치환하고 그것을 여유롭게 환기시킬 수 있는 감성을 공유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상징적 사건이 오키나와에서 일어났다. 오키나와 슈퍼마켓 주인 치바나 쇼이치(知花昌一)가 오키나와에서 거행된 국민체육대회에서 히노마루(일장기)를 불태워 버린 사건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루웨이의 숲’과 치바나의 ‘히노마루 소각 사건’의 이 기묘한 앙상블은 연일 미디어를 장식하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이 풍요롭고 평화로운 시기에 잊고자 했던 미국종속과 미군기지 문제를 환기시킨 치바나는 우익의 공격과 함께 사법처리까지 받아야 했다. 이 사건에 대해서 오키나와에서 성장했던 시카고대학의 노마 필드 교수가 “오키나와 사람들의 히노마루에 대한 반감은 오키나와 군사기지화를 찬성함으로써 유지가 가능했던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발과 깊은 연관이 있다5고 주장했었다. 미국과의 안보조약 반대투쟁 등이 과거형으로 서사되는 하루키의 소설에 대한 호응과, 대조적으로 지금 여기의 고통임을 주장하는 치바나의 외로운 투쟁은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의 대조적 상황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이로부터 30년이 지난 지난주, 필자는 치바나가 사는 오키나와 요미탄손(讀谷村)을 방문했다. 이곳은 오키나와 전쟁의 참혹한 기억들이 아직도 살아있는 곳이다. 주민들이 강제적으로 집단자살 했던 카마(동굴)에는 끔찍했던 주민들의 한이 사무쳐 있다. 노마필드는 오키나와 주민과 일본인의 죽음을 미화시켜서는 안 되는 이유는 전쟁에 동원된 식민지 주민과 일본제국의 침략을 받은 아시아인들의 죽음이 잊혀지기 때문이라 했었다.

오키나와 내부에 이러한 의식이 살아있음을 상징하는 “한의 비석(恨之碑)”이 요미탄손의 인적 드문 언덕에 조용히 서 있다. 오키나와 전투에 강제 동원되어 희생된 조선인들을 기리고자 2006년에 세워졌다 한다. 오키나와 주민의 희생과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의 죽음은 국적이라는 층위를 뛰어넘은 연장선에 있다. 지금 일본과 한국의 과거사 문제를 넘어, 전쟁포기를 헌법에 명기했던 ‘평화국가 일본’이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 탈바꿈을 하고 있다. 오키나와의 아름다운 자연에 산재한 망자의 고통이 지금 여기의 고통으로 되살아니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일 것이다.

고영란 일본 니혼대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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