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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코리아 62년... 연예계 넘어서 다양한 직군서 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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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코리아 62년... 연예계 넘어서 다양한 직군서 두각

입력
2018.07.03 04:40
수정
2018.07.03 17:07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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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령 고현정 등 스타 발굴

교수ㆍMC 등 분야 넓혀 활약

미의 제전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제62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4일 오후 7시 서울 송파구 올림픽홀에서 막을 올린다. 왕관의 주인공도 곧 가려진다.

미스코리아 대회는 급변하는 시대와 조응하며 62년간 이어져 왔다. 잊지 못할 영광스러운 순간과 명장면도 많다. 미스코리아가 지나 온 길을 되밟으며 결정적 장면 속에 숨겨진 의미를 짚어봤다.

1959년 미스코리아 당선자 퍼레이드를 보기 위해 몰려든 시민들. 국가기록원 제공
1959년 미스코리아 당선자 퍼레이드를 보기 위해 몰려든 시민들. 국가기록원 제공
1959년 미스유니버스 대회에서 화제를 모으며 할리우드 러브콜을 받은 미스코리아 진 오현주가 대회를 마치고 귀국한 모습. 패션디자이너 노라노(왼쪽부터)와 오현주, 오현주의 어머니 박점출 여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1959년 미스유니버스 대회에서 화제를 모으며 할리우드 러브콜을 받은 미스코리아 진 오현주가 대회를 마치고 귀국한 모습. 패션디자이너 노라노(왼쪽부터)와 오현주, 오현주의 어머니 박점출 여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1950년대: 할리우드 러브콜 받았던 미스코리아

1959년 3회 대회 진 당선자 오현주는 그 해 국제미인대회인 미스유니버스 대회에 참가해 깜짝 스타로 떠올랐다. 화려한 미모는 아니지만 재치 있는 언변과 무대 매너로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했다. 개회식에서 나라를 상징하는 선물로 준비한 장구를 ‘두둥’ 치면서 등장한 일화도 유명하다. 오현주는 상위 15위 본선 진출을 이뤘을 뿐 아니라 스피치상, 선외상, 스포츠상, 인기상 등 특별상 4개 부분에서 수상하며 인기를 증명했다. 대회가 끝난 뒤 할리우드에서 러브콜이 쏟아졌다. 당대 인기 배우인 윌리엄 홀던과 말런 브랜도의 상대역도 제안받았다.

오현주의 활약은 국민에게 자긍심을 안겼다. 세계 무대에서 전쟁 폐허로 각인된 한국의 이미지도 바꿨다. 미스유니버스 참가자를 뽑기 위해 1957년 시작된 미스코리아는 그 시절 한국의 얼굴이었고 민간 외교관이었다. 전쟁에 상처 입은 국민을 위로하고 자부심을 북돋으며 사회 통합 역할을 했다.

1963년 미스코리아 진 김명자가 미스유니버스 대회에서 5위에 입상한 뒤 귀국해 카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63년 미스코리아 진 김명자가 미스유니버스 대회에서 5위에 입상한 뒤 귀국해 카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60~70년대: 국가대표급 인기로 유행 선도

마땅한 볼거리가 없던 시절 미스코리아 대회는 국가 행사로 여겨졌다. 미스코리아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대회 참가 후보자들이 시가 행진을 할 때마다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1963년 미스유니버스 대회에서 5위로 입상하고 돌아온 미스코리아 진 김명자는 공항에서 옛 중앙청(1996년 철거)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미스코리아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는 장면이다.

인기만큼 경쟁이 치열해서 웃지 못할 해프닝도 벌어지곤 했다. 조금 더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가슴 보형물과 엉덩이 보형 솜뭉치를 사용한 참가자들이 정형외과 출신 심사위원의 눈썰미에 걸려든 일화가 1962년 대회 당시 기사로 소개됐다. 기혼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대회에 참가했다가 이후 미스코리아 자격이 박탈된 사례도 있었다.

1972년 지상파 생중계가 시작되면서 미스코리아의 파급력은 더욱 커졌다. TV를 통해 대중에 더 가까워진 미스코리아는 문화 콘텐츠로 자리잡아 갔다. 미스코리아 화장법과 헤어스타일 등이 유행했고, 뷰티 산업도 한층 발전했다.

1988년 미스코리아 대회 팸플릿에 실린 김성령(왼쪽)과 1989년 대회 팸플릿에 실린 고현정.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8년 미스코리아 대회 팸플릿에 실린 김성령(왼쪽)과 1989년 대회 팸플릿에 실린 고현정.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0~90년대: 연예계 등용문

특기는 웅변, 취미는 사진, 장래희망은 앵커. 1988년 진이자 올해 미스코리아 대회 심사위원장인 김성령이 당시 대회 참가 신청서에 써 넣은 내용이다. 1989년 진 오현경은 좋아하는 음식으로 특이하게 해장국을 적기도 했다. 같은 해 선에 당선된 고현정의 당시 장래희망은 지리학자. 존경하는 인물은 영국 마거릿 대처 수상이었다.

이처럼 다양한 매력과 재능을 지닌 미스코리아들을 가장 눈여겨본 곳이 연예계다. 1980~90년대 미스코리아 대회는 연예계 등용문 역할을 했다. 김성령 오현경 고현정 외에도 1991년 선 염정아와 1992년 미 이승연 등이 배우로 데뷔해 한 시대의 아이콘으로 사랑받았다. 1991년 진 이영현과 1993년 진 궁선영은 MC로, 1992년 선 장은영은 KBS 아나운서로 방송가를 누볐다. 미스코리아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한 축을 담당하던 시대였다.

미스코리아는 사회 각 분야로 진출해 맹활약하고 있다. 2002년 진 금나나(왼쪽부터)는 하버드대 박사 학위를 받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2001년 선 서현진과 2005년 진 김주희는 각각 MBC와 SBS 아나운서를 거쳐 프리랜서로 활약 중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미스코리아는 사회 각 분야로 진출해 맹활약하고 있다. 2002년 진 금나나(왼쪽부터)는 하버드대 박사 학위를 받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2001년 선 서현진과 2005년 진 김주희는 각각 MBC와 SBS 아나운서를 거쳐 프리랜서로 활약 중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00년대: 여성 인재 발굴의 장

미스코리아는 꿈을 위한 도약대이기도 했다. 의대 재학 중에 2002년 진에 당선돼 화제를 모은 금나나는 미스유니버스 대회에 참가한 뒤 “또 다른 큰 세계를 만나고 싶다”는 꿈을 품고 유학을 떠나 2015년 하버드대 영양학과 역학 분야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스코리아가 되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미래다.

방송계에 진출한 미스코리아도 많아졌다. 2005년 진 김주희는 SBS 아나운서로, 2001년 선 서현진과 2007년 미 이진, 2009년 선 차예린은 MBC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10년 전에도 방송은 인재가 몰려드는 인기 직종이었다. 실력으로 무장한 이들의 활약으로 미스코리아 대회는 여성 인재 발굴의 장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올해 미스코리아 본선 진출자 32명이 진ㆍ선ㆍ미를 가리기 위해 4일 무대에 오른다. 한국일보 E&B 제공
올해 미스코리아 본선 진출자 32명이 진ㆍ선ㆍ미를 가리기 위해 4일 무대에 오른다. 한국일보 E&B 제공

2018년: 새로운 미스코리아는 누구

올해 미스코리아 후보자들은 개성이 넘친다. 장래희망도 배우, 언론인, 승무원부터 소믈리에, 엔테테인먼트 회사 최고경영자, 교수, 약학연구원, 슬로푸드연구가, 청와대 대변인 등 종잡을 수 없다. 자신을 나타내는 3가지 해시태그에 ‘#어서와 #왕관아 #OO는처음이지?’ ‘#보라빛향기 #올해의주인공 #나야나’ ‘#소나무 #1년반 #소확행’ 등 흥미로운 문구를 소개한 참가자도 있다. 미스코리아 대회는 다양한 가치관을 지닌 참가자들이 끼를 펼치는 무대로 또 한번 변신하고 있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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