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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세월

입력
2017.04.16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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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마다 교정에는 영춘화, 산수유,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벚꽃, 철쭉, 배꽃이 핀다. 사람들은 그 꽃 아래에서 웃으며 사진을 찍거나 혹은 가만히 앉아 계절을 즐긴다. 이 꽃들보다 더 아름다운 건 새싹이다. 목련이 지고 벚꽃도 떨어질 무렵이면, 연두색 새싹이 교정 곳곳 가지가지마다 피어난다. 그 맑고 파란 잎이 쑥쑥 올라오는 것이 얼마나 기특한지 모른다.

연두색 잎들이 교정을 채울 무렵, 어린이집 아이들은 선생님과 함께 구내도로를 건너 소풍을 오곤 한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안내에 맞춰 오른손을 높이 들고 길을 건넌다. 아이들은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약속, 손을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면 차들이 멈춘다는 것을 믿고 용감하게 길을 나서는 것이다. 마치 3년 전 그날 세월호의 아이들처럼.

나쓰메 소세키의 <유리문 안에서>란 수필집에는 자신의 슬픈 연애담을 고백한 여성에 관한 짧은 글이 실려 있다. 그녀는 얘기를 마친 후 이걸 소설로 쓸 경우 결말에서 “여자가 죽는 게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그래도 살아가도록 쓰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나쓰메 소세키는 머뭇거리다가 헤어질 무렵 그녀에게 죽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부탁했다. 그는 “그 사람은 도저히 회복될 가망이 없을 만큼의 깊디깊은 상처를 마음속에 지니고 있었다. 동시에 그 상처는 여느 사람이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뿌리내려 그 사람을 빛나게 해주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그렇게 부탁한 이유를 “나는 그녀를 향해 모든 것을 치유해 주는 ‘세월’의 흐름에 좇아가라고 했다. […] 공평한 ‘세월’은 소중한 보물을 그녀에게서 빼앗는 대신, 그 상처 또한 차츰 치유해 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나쓰메 소세키, 김정숙 역, <유리문 안에서>, 민음사, 2000).

그의 말처럼 세월이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해마다 오는 봄은 우리가 겨울 동안 겪은 두려움과 절망을 치유한다. 여름은 봄의 비극적 기억을 치유하고, 가을은 여름의 격정을 가라앉힐 것이다. 그리고 아이는 어른들의 부끄러움을 감추고 희망을 준다.

그러나 세월이 모든 것을 치유해 주지는 못한다. 때때로 어떤 상처는 그 흔적과 기억은 세월 따라 무뎌지지만 아픔은 그대로 남기곤 한다. 지난 3년 동안 우리는 스스로가 존재한다고 믿었던 공적 윤리와 민주적 질서가 무너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아픔을 경험했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서로의 아픔에 공감할 능력마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살아남은 사람은 이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의 기억을 애써 잊고, 부자는 일부의 빈곤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며, 정규직은 비정규직 차별에 눈을 감고… 서로가 분리된 채 살아간다.

이 상처는 그렇게 쉽게 치유될 수 없을 것 같다. 시간은 개인으로부터 아픈 기억을 빼앗고 상처를 치유하지만, 사회는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 상처가 준 아픔을 그대로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간에만 상처를 치유할 책임을 맡길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그날, 모두가 구출될 수 없다는 걸 알고선 세월호를 떠나버린 선원들과 다를 바 없다.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가 제공되지 않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기회를 얻을 수 있고 그렇게 얻은 기회가 정당하거나 혹은 적어도 비윤리적이지는 않다고 믿는 우리는 그들과 같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갖고 있는 이 부끄러움은 우리 세대에 끝날지 모르지만, 세월호 사건과 이후 일련의 사태에서 드러난 한국 사회의 아픔은 우리의 성찰과 의식적 노력에 의해서만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봄마다 피어난 새싹이 하늘에서 내리는 공평한 비와 햇빛에 의해서만 자라날 수 있듯이, 우리 사회의 다음 세대는 민주주의, 공평한 기회와 연대의식 위에서만 제대로 성장할 수 있다.

도재형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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