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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87년 헌법과 노동체제 톺아보기

입력
2017.03.26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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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이후 진행될 헌법 개정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87년 노동체제’의 폐해, 즉 비정규직 확산, 소득 양극화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그 작업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먼저 ‘87년 헌법’의 노동․경제 조항을 살펴봐야 한다. 이는 지난 30년 동안 유지된 87년 노동체제의 법 이념을 톺아보고, 개정 헌법의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흔히 87년 헌법의 특징 중 하나로서 노동3권 영역에서 국가 규제 권한의 약화를 든다. 구 헌법 제31조는 파업권의 일반적 제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특히 공공기관과 방위사업체, 대규모 사업장에서 파업권을 넓게 제한할 수 있도록 규정했으나, 87년 헌법 제33조 제2항은 파업권을 제한할 수 있는 근로자의 범위를 “법률이 정하는 주요방위사업체”로 대폭 축소했다. 이렇게 87년 헌법이 선택한 일반 근로자, 특히 대규모 사업장 소속 근로자의 파업권에 대한 규제 철폐는, 87년 노동체제의 특징인 재벌 대기업 소속 정규직 근로자의 조직력 확대라는 결과를 이끈 규범적 근거로 작용하게 된다.

국가 규제 권한의 약화는 경제 영역에서 동일하게 발현되었다. 구 헌법 제120조는 우리나라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질서를 채택했다는 점을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는 문언을 통해 밝혔다. 그런데 87년 헌법 제119조는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즉, 시장경제질서의 주체에 ‘기업’을 병기함으로써 기업이 국가의 규제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획득했음을 천명했다.

그리고 이전 헌법 제120조는 경제에 관한 국가의 규제 권한에 관해 “국가는 […]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하여 필요한 범위 안에서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한다”, “독과점의 폐단은 적절히 규제․조정한다”고 규정했다. 구 헌법에 의하면, 국가의 규제 권한은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해 행사되어야 하고 재벌의 독과점은 규제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87년 헌법은 위 두 문장을 하나로 합쳐 제119조에서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라고 규정함으로써 ‘사회정의’의 실현이라는 목표를 삭제하고, 국민경제의 ‘성장’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로써 경제에 관한 국가의 규제권은 약화되었다.

위와 같은 점에 비춰볼 때, 노동과 관련하여 87년 헌법의 특징은 ‘기업의 시민권 획득과 국가 규제 권한의 약화’라고 말할 수 있다. 즉 87년 노동체제는 ‘노동의 시민권이 법적으로 주어지고 노사 자치주의의 공간이 확보된 체제’이지만, 그 기본 정신은 ‘신자유주의, 시장만능주의에 토대하는 노사 자율주의’였다(김장호, “유연성과 공공성이 함께 하는 노사관계 패러다임”, 노사공포럼 제40호).

87년 노동체제 30년 동안, 저소득층의 상황은 악화되고, 어떤 지표로 측정하든 소득불평등은 과거보다 높게 나타나고 있다. 성장이란 미명 하에 부(富)에 대한 탐욕적 추구는 정당화되었다. 이는 87년 헌법이 용인한 신자유주의와 노사 자율주의가 일으킨 부작용이다. 87년 헌법을 통해 우리는 정치적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했지만, 이것은 사회적 차원까지 확대되지 못했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정 헌법에서 비정규직 확산을 막고 근로소득 격차를 완화하며, 확대된 자율의 탐욕을 억제할 수 있는 규범적 기초를 보완해야 한다. 이 작업은 87년에 그러했듯이 대담하게 이뤄져야 한다.

도재형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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