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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보통 엄마들의 행복찾기 “우린 욜로 대신 소확행”

입력
2018.04.04 04:4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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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즐길 만큼 경제적 여유 없지만

큰돈 쓰지 않고 ‘작지만 큰 행복’

경기 오전초등학교 학부모 14명

밑줄독서모임 만들어 2년째 활동

“책 한 권으로 소통하는 힐링의 시간입니다.” 지난달 23일 경기 의왕시 오전초등학교에는 매주 금요일 오전 10시가 되면 ‘밑줄 독서모임’을 위해 엄마들이 모인다. 강미정(앞에서부터 시계반대방향으로), 김희진, 최정선, 박수진, 정중현, 임수연, 김복희, 박성문, 이수현, 신은정, 형경, 손점남, 박정은, 윤미라씨가 이날 토론을 나눈 책 ‘개인주의자 선언’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의왕=서재훈기자
“책 한 권으로 소통하는 힐링의 시간입니다.” 지난달 23일 경기 의왕시 오전초등학교에는 매주 금요일 오전 10시가 되면 ‘밑줄 독서모임’을 위해 엄마들이 모인다. 강미정(앞에서부터 시계반대방향으로), 김희진, 최정선, 박수진, 정중현, 임수연, 김복희, 박성문, 이수현, 신은정, 형경, 손점남, 박정은, 윤미라씨가 이날 토론을 나눈 책 ‘개인주의자 선언’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의왕=서재훈기자

지난달 23일 금요일 오전 10시. 경기 의왕시 오전초등학교 2층 협의실에 중년 여성 14명이 모여들었다. 아들 딸을 둔 학부모, 보통 엄마로 불리는 이들이다. 엄마들은 탁자 두 개에 나눠 앉아 자리를 잡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방에서 책 한 권씩을 자연스럽게 꺼냈다. 문유석 판사가 쓴 책 ‘개인주의자 선언’(문학동네)이 탁자 위에 하나 둘씩 펼쳐졌다. 한 엄마가 책장을 빠르게 넘겼다. 페이지마다 그어진 형형색색의 밑줄이 선연했다. 붉은색 혹은 노란색 밑줄에서 꼼꼼한 독서가 전해졌다. “자, 이제 시작합시다!” 순간 정적이 흐른다.

“잃어버린 나를 찾은 행복한 시간”

14명의 엄마들은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기 위해 모였다. 책벌레들의 만남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책을 통해 고민을 공유하고 상담을 주고 받으며 서로의 삶을 교환한다.

“결국 사람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감히 대단한 명답을 제시해 분쟁을 해결했다는 생각은 착각일 뿐이었다.” 김복희(45)씨가 ‘개인주의자 선언’에서 인상 깊었던 문장들을 읊었다. 그러더니 이내 자신의 생각을 담아 낸다. “나는 어릴 때부터 분쟁 담당이었어. 친구들이 ‘이거 내가 잘못한 게 아니지?’ 하고 물어도, ‘이건 네가 잘못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해주곤 했지.” “시시비비를 가려주는 거요?” 김씨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정중현(37)씨가 한 마디 거든다. “그렇지. 시시비비를 가리는 거지. 예전에 회사를 다닐 때도 난 그런 역할을 했어. 하지만 어떨 때는 평정심을 잃게 되고 공정성을 가리기 힘들 때도 있더라.”

최정선(41)씨는 “시시비비를 가려주려다가 아이에게 듣는 말이 있어. ‘엄마랑 말하기 싫어!’ 하는데 가슴에 비수가 되기도 해”라며 딸 아이와의 고민을 슬쩍 꺼냈다. 그러자 ‘분쟁 담당’이라던 김복희씨가 경험담을 들려준다. 그는 “우리 애는 어느 날 한 아이와 싸웠다며 ‘다신 걔랑 안 놀아’라곤 화를 내더라. 당장 그 때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며 “나중에 ‘엄마, 내가 그냥 미안하다고 했어’ 하길래, ‘걔가 이상한 거 아니었어?’ 했더니 ‘아니야. 내가 사과했어’라고 해서 놀랐다”는 일화였다. 그러면서 “아이는 당장 싸웠다는 것에 대해 반은 화가 나고, 반은 죄책감이 들었을 것”이라며 “아이들에게 자정능력이 있는데 우리가 그들을 못 기다려주는 게 아닐까?”라는 해답을 제시했다.

임수연(45)씨도 “4학년인 아이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지만 기다려주고 있다. 그러다가도 ‘내가 너무 기다리나?’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이라며 자신의 경험도 전했다. 김복희씨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럴 때는 ‘지인 찬스’를 써라. 아이의 주변인들에게 물어보는 거다”며 “아이 친구 중 한 명에게 ‘우리 아이 요즘 어떠니?’하고 물어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저작권 한국일보] ‘밑줄 독서모임’의 엄마들이 책을 읽고 각자의 생각을 나누며 토론하고 있다. 의왕=서재훈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밑줄 독서모임’의 엄마들이 책을 읽고 각자의 생각을 나누며 토론하고 있다. 의왕=서재훈기자

박성문(44)씨가 책을 뒤적인다. 책의 한 구절을 읽어 내려간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하는 존재다. 어릴 때부터 잘하든 못하든 뭔가를 책임지고 하는 것 자체에 대해 아낌없이 칭찬하고 못한 부분은 감싸주고 격려하는 문화가 기꺼이 책임지는 어른을 만들어낸다.” 박씨는 “책임 문화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더라. 아이들을 키우며 공감이 가는 구절”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정중현(37)씨가 “정말 요즘 고민이 많이 된다”며 말을 잇지 못했고 이내 눈물을 흘렸다. 직장 생활을 하는 정씨는 요즘 일과 아이 사이에서 고민이 많다. 박수진(40)씨가 “세상엔 정답이 없다”며 정씨의 등을 토닥토닥 해준다. 순간 독서모임은 ‘육아상담소’로 변했다. 고민을 털어놓고 나누고 해답을 찾는, 삶의 지혜를 배우는 공간처럼 보였다.

옆 테이블에서는 진실과 참말에 대한 얘기가 한창이었다. 책 속의 문장인 ‘살집이 좀 있는 사람에게 뚱뚱하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 아니다. 그러나 참말이기는 하지만 굳이 이 밖에 낼 필요는 없는 말이다’를 놓고 토론이 이어졌다. 신은정(38)씨는 “신부님의 말씀이 기억난다”며 “말은 말씀과 말씨 그리고 말투로 나눌 수 있다고 하더라. 말씀은 듣고 새기는 것이고, 말씨는 누군가에게 예쁘게 말하면 그것이 씨앗이 되어 퍼져나갈 수 있다. 말투는 싸우자는 것이라고 하셨다”고 전했다. “말투를 내뱉지 말고 말씀을 새겨 듣고 말씨를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주옥 같은 명언이 뒤따랐다. 손점남(47)씨는 “일상에서 말조심하는 게 힘들다. 순간순간 내뱉는 말이 상처가 될 수도 있고, 말조심을 해야지 하면서도 실수를 할 때가 많다”며 신씨의 이야기에 공감했다.

[저작권 한국일보] ‘밑줄 독서모임’의 엄마들은 책에 대한 토론을 넘어 서로의 고민을 나누고 삶의 지혜를 얻으며 자그마한 행복을 찾고 있다. 의왕=서재훈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밑줄 독서모임’의 엄마들은 책에 대한 토론을 넘어 서로의 고민을 나누고 삶의 지혜를 얻으며 자그마한 행복을 찾고 있다. 의왕=서재훈기자

집 거실이나 카페에서 혼자 책을 읽으면 만들기 힘든 경험이다. 큰 돈을 들이지 않으면서 행복에 다가가는 행위이다. 남들은 그게 얼마나 큰 행복이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이들에게는 소중하고도 명백하다. 20~30대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소확행’(小確幸ㆍ작지만 확실한 일상 속 행복)이 이들 엄마들 사이에서도 유효한 셈이다.

소확행은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수필 ‘랑겔한스섬의 오후’(1986)에서 처음 사용한 단어다. 막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서 먹을 때, 가지런히 정돈된 집안을 볼 때, 자신이 좋아하는 카페 유리창가에 앉아 따스한 커피를 마시며 바깥 풍경을 즐길 때 그 어느 것 못지않은 행복을 느끼는 상태다. 요컨대 소확행은 큰 돈 들이지 않고, 육체적 정신적 노력을 그리 많이 하지도 않고도 일상에서 얻게 되는 소소한 행복에 대한 예찬이 담긴 표현이다.

무라카미가 처음 사용한 후 3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일본도 아닌 한국 젊은 층에게서 소확행이 최근 각광 받는 이유는 사람들이 실패와 결핍을 느껴서다. 제 아무리 공부해도 취업의 문턱을 넘기 힘들고, 직장을 잡는다 해도 월급통장은 학자금 대출 갚느라 금세 비기 일쑤다. 집값은 비현실적으로 높아만 가고, 돈 모일 새는 없으니 많은 것을 포기하고, 많은 것에서 허기를 느낄 수 밖에. ‘결핍의 세대’ N포세대는 돈을 쓰지 않으면서도 행복을 느끼려 한다. 명품 핸드백을 무리해서 사고, 휴가기간에 오래도록 벼른 장소로 여행을 떠나는 욜로(YOLO)족과는 처지가 다르다. 욜로가 현재의 삶을 파괴하지 않는 수준에서 물질적 정신적 행복을 최대한 누리는 행태를 가리킨다면 소확행은 그 반대편에 해당한다.

N포세대에 비하면 아직 가진 것이 많고, 누릴 것이 많은 중년 엄마들이라고 해도 욜로족이 되긴 어렵다. 직장과 육아와 가사를 함께 하는 경우이든 직장이 없는 엄마이든 욜로는 소수에게 적용되는 특별한 혜택일 뿐이다. 현재를 즐기기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할 만한 물질적 정신적 여유가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N포세대와 경제적 상황은 다르지만 시간적 정신적 요건은 비슷한 셈. 엄마들이 욜로 대신 소확행을 추구하는 이유다.

“집안일 잊고 온전히 나를 위해

2시간 동안 존중, 소통, 행복

얘기 나누다 보면 스트레스 싹~

가치관 바뀌며 일상 달라졌어요”

‘밑줄 독서모임’의 엄마들이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으며 인상 깊었던 구절을 이야기하고 있다. 서로 경청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의왕=서재훈기자
‘밑줄 독서모임’의 엄마들이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으며 인상 깊었던 구절을 이야기하고 있다. 서로 경청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의왕=서재훈기자

살림ㆍ육아에 지친 엄마들 모여라

엄마들의 소확행은 젊은 세대와는 좀 다르다. 젊은 세대가 개인에 몰두하며 행복을 찾는다면, 엄마들은 모임을 조직해 작은 행복을 나누며 큰 행복을 추구한다.

지난 2016년 4월의 어느 날. 세 아이의 엄마인 박수진씨는 두 딸이 다니는 오전초등학교에서 공문 한 장을 받았다. 학부모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독서모임을 주선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평소 낯가림이 심해 아파트 반상회도 꺼리는 그였지만,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눈다는 사실에 끌렸다. 내심 “엄마가 독서하는 모습을 먼저 보여주면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따라오겠지”하는 마음이 더 컸다. 자신보다 아이들 생각을 먼저 했다. 즉각 신청서에 사인을 했다. 10명의 엄마들이 쭈뼛쭈뼛 교실에 모였다. ‘밑줄 독서모임’의 시작이었다. 얼굴이 빨개지며 “내 말에 비웃으면 어떡하지”를 걱정했던 박씨는 현재 이 모임의 회장이다. “거의 10년을 누구의 엄마로 불렸지만 이 모임에선 서로의 이름을 불러줘요. 오롯이 저만을 위한 시간이 된 거예요. 귀한 시간이 아닐 수 없죠.”

이날 모인 14명의 엄마들은 살림과 육아에 온 힘을 쏟는 주부들이다. 매주 금요일 오전 10시면 신데델라가 궁전의 파티를 즐기러 가듯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로 향한다. 이때만큼은 아이도 남편도 집안 일도 잊는 자유를 얻는다. 물론 낮 12시가 되면 그 “경청과 존중과 소통의 시간”이 사라져 아쉽긴 하지만. 단 두 시간뿐이지만 이들은 소소한 일상 속에서 작지만 확실하게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을 터득한 듯 보인다.

엄마들의 모임이라고 얕잡아 보면 안 된다. 이들은 서로 감명 깊었던 구절을 읽어주고, 밑줄을 그으며 공유한다. 의왕=서재훈기자
엄마들의 모임이라고 얕잡아 보면 안 된다. 이들은 서로 감명 깊었던 구절을 읽어주고, 밑줄을 그으며 공유한다. 의왕=서재훈기자

이 작은 행복을 위해 엄마들은 일주일을 제법 탄탄하게 쓴다. 책을 한 번 읽고는 토론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번 읽는 건 필수다. 이 때 마음에 담아두었던 구절을 찾는다. 동시에 토론할 때 해줄 말까지 메모하는 엄마들도 있다. ‘헨쇼 선생님께’를 시작으로 ‘내 인생의 첫 번째 시’, ‘채식주의자’, ‘미움받을 용기’, ‘간송 전형필’, ‘공중그네’, ‘손바닥 소설’, ‘무진기행’, ‘나무’ ‘남한산성’ 등 2년 간 읽은 책이 50여권이다.

엄마들은 밑줄 독서 모임을 통해 “일상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모임의 큰 언니인 손점남(47)씨는 “혼자 책을 읽다가 같은 책을 읽고 의견을 나누는 게 큰 기쁨”이라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 새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최정선(41)씨는 “분명 같은 책을 읽었는데 다양한 생각들을 들을 수 있어 흥미롭다”고 했다. 그는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상대방에게 들으면서 생각과 가치관이 바뀌는 걸 느낀다. 생각의 폭이 넓어지는 걸 경험하면서 뿌듯해진다”고 덧붙였다.

지난해부터 참여한 중국인 형경(36)씨는 독서모임이 “선물 같은 존재”다. 2008년 한국에 들어와 살면서 문화와 언어로 고생을 많이 했다. 향수병까지 더해져 우울한 날이 이어졌을 즈음 독서 밑줄 모임을 만났다. 모임은 그에게 독서뿐만 아니라 삶의 지혜도 배우는 공간이다. “9살과 6살 아이들을 키우지만 저만의 시간을 갖기가 힘들었어요.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 터놓고 이야기하는 데에 행복을 만끽하고 있죠.”

의왕=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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