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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뒤 TV광고 낼 테니 만나자" 약속 지킨 선생님, 큰절 올린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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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뒤 TV광고 낼 테니 만나자" 약속 지킨 선생님, 큰절 올린 제자들

입력
2015.05.1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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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원 시흥 장곡고 교장과 제자들 재회… 오늘 스승의 날

지난 10일 이춘원 시흥 장곡고 교장(정 가운데)이 경기 부천 원미동 먹자골목에서 20년 전 제자와 그 아내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부천=고영권기자 youngkoh@hk.co.kr
지난 10일 이춘원 시흥 장곡고 교장(정 가운데)이 경기 부천 원미동 먹자골목에서 20년 전 제자와 그 아내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부천=고영권기자 youngkoh@hk.co.kr

“잘 자라줘서 고맙다.” “건강하게 만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10일 오후 7시 먹자골목으로 유명한 경기 부천시 원미동의 한 족발집. 30대 중반 ‘아저씨’ 10여명이 일제히 한 사람을 향해 큰 절을 올렸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이춘원(53) 시흥 장곡고 교장의 눈가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20년 전 부천 부명중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났던 이들은 그렇게 다시 뭉쳤다. 세월이 흘러 사제(師弟)가 만나는 일이 새삼스럽지는 않지만 이 교장에게 1998년 졸업생들은 조금 더 특별하다. 당시 체육교사로 근무했던 이 교장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아쉬워 제자들의 모습을 영상에 담은 뒤 “20년 뒤 TV 광고를 낼 테니 꼭 다시 만나자”는 뜬금없는 약속을 했다.

처음엔 일개 교과목 선생님을 기억해 줄 리 없다고 생각했다. “떠나 보내는 아이들이 눈에 밟혀 그리움을 담는 작업이었습니다. 저 만의 짝사랑이었지요.”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지상파 방송사의 문을 두드렸는데, 당시 찍은 영상광고가 떡 하니 전파를 타면서 꿈이 이뤄졌다.

이날 모임은 그 뒤풀이 자리다. 방송에서 못다한 노래 ‘스승의 은혜’가 울려 퍼졌고, 그 때로 돌아가 이야기 꽃을 피우느라 재잘거림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선생님, 이제 와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저희가 운동장에서 축구 하면서 몰래 담배를 피운 거 아셨어요? 모래 때문에 연기가 안 보일 거라고 우리는 확신했거든요.”(조한빈ㆍ33) “당연히 보였지 이놈아. 피우지 말란다고 안 피울 놈들이냐. 그냥 못 본 척 한 거지.”

오랜 시간이 지나도 격의 없는 사제의 대화는 이 교장이 아이들을 ‘해바라기’같은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다. 태양이 비추는 곳이면 어디든 뿌리 내리고 쑥쑥 크는 해바라기처럼 밝게 자라주기만 한다면 모범생이든, 말썽꾸러기든 모두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이 교장은 “제자들을 옆에서 보듬어주는 게 교사의 역할이라는 신념은 교직 생활 30여 년 동안 한번도 변한 적이 없다”고 했다.

졸업 후 18년 만의 만남도 어찌 보면 철저한 준비의 산물이었다. 이 교장은 먼 훗날 볼 제자들에게 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간절함에 다시 펜을 잡았다. 교육학 박사 학위를 따고 교육청 장학사와 교감 자리를 거쳐 지난 지난해 장곡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짝사랑일 것이란 우려는 이 교장의 착각이었다. 유난히 작은 이 교장의 발 사이즈까지 기억할 만큼 그를 추억하는 제자들이 많았다. 체벌이 일상이던 시절, 말썽을 피워도 품는 게 먼저였던 그를 제자들은 그리워했다. 사춘기를 심하게 겪었다는 안석현(33)씨는 “큰 실수를 해 경찰서에 간 적이 있는데 잔뜩 겁에 질려 전화한 곳은 부모님도, 담임 선생님도 아닌 이춘원 선생님이었다”며 “경찰서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와 내 머리를 쥐어박던 경찰에게 ‘내 새끼는 때려도 내가 때린다’고 소리 지르던 선생님의 모습이 선하다”고 말했다. 김도영(32)씨도 “회초리로 엉덩이를 때리고 나면 꼭 운동장으로 데려가 등목을 시켜주던 스승이었다. 먼저 찾아주셔서 죄송할 뿐”이라고 회고했다.

땀에 절은 교복 셔츠를 입고 복도를 휘젓던 영상 속 녀석들은 어느덧 가장의 무게를 아는 나이가 됐다. 곧 아빠가 되는 변기성(33)씨는 해산을 엿새 앞둔 만삭의 아내와 함께 은사를 찾았다. 이달 말 결혼하는 김봉섭(33)씨도 청첩장을 들고 나타났다. 두 사람은 “말썽꾸러기 까까머리가 가정을 꾸려 열심히 살고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다”며 이 교장의 손을 잡았다.

잔소리는 이제 제자들의 몫이다. 여태껏 담배를 즐기는 이 교장에게 조한빈씨가 “다음 모임 때까지 금연하시라”는 숙제를 내주자 폭소가 터졌다. 과제를 받아 든 이 교장은 “제자들이 내 준 숙제를 할 생각에 행복하다”며 감격해 했다.

이 교장이 제자들 앞에 내민 편지 뭉치에서 익숙한 필체를 발견한 유석열(33)씨가 낡고 빛 바랜 편지 한 장을 들고 스승 앞에 섰다. “20년 뒤에 꼭 찾아 뵙고 그 땐 제가 술 한 잔 사겠습니다.” 족발집 사장이 된 유씨는 그 약속을 지켰다.

김민정기자 fac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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