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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석의 우충좌돌] 정규직 확대와 기득권의 역설

입력
2017.11.28 11:49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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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행복’은 때로는 절망의 상징이기도

기존 정규직 양보 없이 일자리 안 늘어

사실 인정 어려운 ‘팩트 고문’도 곳곳에

2년 전 학과대표를 하던 여학생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찾아왔다.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는 것이다. 기꺼이 축해해 주었다. 그러나 한마디를 덧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공무원시험만 보려고 하니, 문제는 문제다.” 물론 그 학생도 이걸 모르는 건 아니다. “그렇기는 한데, 안정된 직장을 찾다 보니……”

겉으로만 보면, 안정된 직장을 구한다면서 공무원시험에 매달리는 많은 20대는 패기와 창업정신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보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패기와 기업가정신을 가지라고 말하고, 더 나아가 해외로 진출하라고 주문할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젊은이들이 직면한 현실을 간과한 말이다. 희망을 가지는 것과 패기를 가지는 것이 고문이 되는 현실이다. ‘노오력’이 조롱의 대상이 되고, ‘희망고문’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어쨌든 ‘희망고문’이란 말이 바람직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 말이 받아들여지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젊은이들이 창업하는 대신 하급 공무원에 목을 매는 현실은 몰락의 징후라고 할 수 있다. 10여 년 전만 해도,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매력은 없지만 안정성 때문에 선호한다는 태도에는 아이러니에 대한 감각이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직업 안정성 때문에 ‘묻지 마 공시’가 압도적 현상이 됐으니, 심각성이 커진 셈이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패기를 주문하지도 못하는 나이든 세대의 우울한 태도 역시 몰락의 징후이다. 희망 없는 것이 고문, 희망도 고문, 그리고 희망을 주지 못하는 고문이 겹친다.

일본은 이 과정을 먼저 겪었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은 국가와 사회는 침몰하고 있는 와중에서, 젊은이들이 미래에 대해 별 다른 희망을 가지지 않으면서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역설에 대해 서술한 책이다. 저자는 젊은이들이 소소한 행복에 만족하는 이 현상이, 이제까지 경제발전만 되면 모든 게 해결되리라 믿은 시대에 대한 복수라고 해석한다. 이 행복이 ‘기묘하고’ ‘뒤틀린’ 것이더라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국가의 성장이 개인의 발전도 가져온 시대는 저물었기 때문이다. 국가의 미래가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아예 갖지 않은 채, 오늘 조금 행복할 수 있으면 만족하는 개인들. 고승에게 생겼던 사리가 절망 속에서도 행복을 느끼는 젊은이들에게 생겼단다.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니다.

20세기 후반까지 국가 주도의 산업화 과정은 괜찮은 일자리를 계속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정 아래 진행됐지만, 더 이상 안정적 정규직을 유지하거나 심지어 확대하기는 여러 모로 어렵게 됐다. 자동화에 이은 인공지능 발전은 이 과정을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현재 정부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희망을 주려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정규직을 쉽게 확대할 수 있을까? 올해는 출범 첫 해니 그나마 정부가 강력하게 밀어붙일 수 있었다.

그러나 정규직 확대를 힘들게 만드는 구조적 요인이 있다. 생산성은 떨어지는데 노동시간만 늘이고 쓸데없이 야근을 하는 문제는 고질적이다. 정규직 노동시간을 줄여서 신규채용을 늘여야 하는데, 누가 반대하는가? 현 상황에서 신규 채용을 꺼리는 기업도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지만, 정규직 노조도 그 못지않다. 또 연봉제를 무조건 거부하고 호봉제를 고수하는 관행도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다.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연봉제를 도입하지 못한 채 호봉제에 매달리는 문제는 일자리 확대에 큰 걸림돌인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논의되지 않는다. 비록 부패한 지난 정부가 연봉제 도입에 적극적이었지만, 그렇다고 호봉제를 바꾸는 일까지 무조건 틀렸다고 볼 필요는 없다.

호봉제를 비롯한 정규직 시스템이 그대로 유지되는 한, 기업들이 신규 채용을 꺼리는 경향이 크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정규직 확대 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축소는 정규직의 구시대적 기득권을 어느 정도 축소할 때 가능하다. 팩트도 고문한다.

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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