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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 오늘, 세계정상에 우리가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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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전 오늘, 세계정상에 우리가 섰다

입력
2017.09.15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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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18인 가운데 한 명인 이태영 당시 본보 체육부 차장. 서재훈기자
1977년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18인 가운데 한 명인 이태영 당시 본보 체육부 차장. 서재훈기자

“여기는 정상, 더 이상 오를 데가 없다.” 해발 8,848m. 1977년 9월15일 낮 12시50분 고상돈 대원의 떨리는 목소리가 무전을 타고 베이스캠프에 울려 퍼졌다. 한국이 네팔에 첫 에베레스트 등반 허가 신청서를 제출한 때로부터 6년, 선발대가 쿰부 빙하를 건너 5,400m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후로부터는 한달 하고도 엿새가 지난 때였다.

등반대로서는 세계에서 14번째, 국가로서는 8번째로 세계의 ‘꼭지점’에 발을 디딘 순간이었다. 만 40년의 세월이 흘러 ‘노병’이 된 이태영(75) 당시 본보 체육부 기자는 지난 12일 친정 한국일보 편집국을 찾아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며 추억의 파편들을 끄집어냈다.

77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이태영(왼쪽) 특파원과 김운영 특파원. 한국일보 자료사진
77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이태영(왼쪽) 특파원과 김운영 특파원. 한국일보 자료사진

구원투수로 나선 한국일보와 전국에서 모인 18명의 ‘특수 부대’

1973년 대한산악연맹을 중심으로 대형 프로젝트가 추진됐다. 문제는 예산이었다. 원정대장이자 당시 산악연맹 회장이던 김영도 국회의원이 고심 끝에 찾아간 곳은 한국일보였다. 이태영씨는 “(김영도씨가)체육에 조예가 깊고 외교와 정치 다방면에 수완이 남다른 한국일보를 찾아가 ‘우리 숙원이 있다’고 읍소했더니 흔쾌히 도움을 약속했다고 전해 들었다”면서 “활쏘기 대회, 씨름대회도 획기적이었지만 에베레스트 등정이야말로 한국일보의 혼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한국일보는 40년 전 6,000만원이라는 거금을 마련해 원정대를 지원했다.

김영도 의원이 대한산악연맹 부회장을 맡은 후 1971년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인 로체샤르로 원정을 갔을 때 네팔 정부에 에베레스트 입국신청을 냈다. 이것이 에베레스트 등정의 출발이다. 1973년 네팔 정부는 1977년 포스트 몬순기(9월~11월)에 입국하라는 통보를 보내왔다. 그러자 전국에서 대원들을 모아 ‘77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꾸려졌고 지리산 칠선계곡으로 동계훈련을 떠나는 것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1975년과 1976년 두 차례에 걸쳐 에베레스트 지역 정찰을 마친 산악연맹과 본보는 1977년 6월11일 발대식을 갖고 공식적으로 원정대를 출범시켰다. 김영도 원정대장을 비롯해 등반대장에 장문삼, 부대장에 박상열(경북산악회), 이윤선(강원연맹), 김명수(양정산악회), 곽수웅(부산대륙산악회), 고상돈, 한정수(하켄클럽), 이상윤(명지대), 김병준(한국외국어대), 조대행(카톨릭의대), 이기용(설령산악회), 이원영(한국등산학교 강사), 도창호(동국산악회), 김영한(대전쟈일클럽), 전명찬(부산청봉산악회ㆍ이상 당시 소속) 등 20~30대의 패기 넘치는 젊은 산악인들이 모였다.

이태영씨는 “편집국장(당시 김창렬)이 보도대원으로 참가할 기자로 나를 지명했는데 등정을 앞두고 각서도 썼다”면서 “미혼이었으니 가능했을 수도 있지만 미지의 세계에 처음으로 발을 딛는다는 자부심이 용기를 준 것 같다”고 떠올렸다. 역시 대원으로 참가한 김운영 본보 사진부장은 기자일 뿐 아니라 전문 산악인이었다.

개선의 행진 속에 영광의 사나이들은 돌아왔다. 화환을 목에 걸고 손에 든 꽃다발을 하늘높이 들어 '정상등정'에 열광하는 거리거리의 시민들에게 답했다. 77한국에베레스트 원정대원을 맞던 이날 김포공항에서 시내에 이르는 길목, 퍼레이드가 지나는 곳곳마다 이들의 영광을 함께 호흡하는 기쁜 시민들로 메워졌다. 1977년 10월 6일. 한국일보 자료사진
개선의 행진 속에 영광의 사나이들은 돌아왔다. 화환을 목에 걸고 손에 든 꽃다발을 하늘높이 들어 '정상등정'에 열광하는 거리거리의 시민들에게 답했다. 77한국에베레스트 원정대원을 맞던 이날 김포공항에서 시내에 이르는 길목, 퍼레이드가 지나는 곳곳마다 이들의 영광을 함께 호흡하는 기쁜 시민들로 메워졌다. 1977년 10월 6일. 한국일보 자료사진

100일 간의 사투

이렇게 모인 18명은 네팔 입국허가를 받은 1973년부터 ‘특수 훈련’에 돌입했다. 이태영씨 역시 불암산으로, 태릉선수촌으로 전문 산악인 못지 않은 훈련을 소화했다. 원정은 1977년 6월16일 선발대가 출발해 100여일이나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1953년 영국 등반대가 오른 사우스콜을 경유한 남동릉을 택한 원정대는 전통적 등반법인 극지법으로 초반 순항했다. 그러나 1차 공격조로 지명된 박상열 부대장이 8,510m 지점 제5캠프가 설치된 곳에서 정상 등정을 눈앞에 두고 통신이 두절됐다. 조난사고가 의심되는 생각에 좌절과 두려움이 남은 대원들에게 밀려올 때쯤 이태영씨는 또 다른 사명감에 고뇌했다. 그는 “기사를 송고해야 하나 말아야 되나 수없이 고민했다. 조난 사고를 당했다는 증거는 없으니 결과를 보자고 마음 먹고 기사는 쓰지 않았다. 다행히 살아 돌아오는 걸 보고 모두 안도했다”고 말했다. 박상열 부대장은 8,600m에 이르렀을 때 탈진했다가 다음날 새벽 제5캠프를 발견해 구사일생했다. 등정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는 등반 사상 가장 높은 곳에서의 무산소 비박(bivouacㆍ등반 도중 예상치 못한 사태가 일어났을 때 한데서 밤을 지새는 것)으로 기록됐다. 절박한 심정으로 김영도 대장이 2차 공격조로 지목한 고상돈 대원은 순조롭게 전진을 거듭한 끝에 박상열 부대장이 후퇴한 지점을 지나 낮 12시50분 에베레스트를 밟은 55번째 산악인이 됐다. 본격적인 등반 개시 36일 만으로 역대 가장 짧은 기간이었고, 한국이 세운 9월15일 등정은 포스트 몬순기에서는 가장 빠른 날짜로 이 기록은 이후 15년 동안 깨지지 않았다. 이태영씨는 “국산 장비만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에 가서 사기도 했고, 현장에서 다른 산악 원정대가 남겨 놓은 산소통을 주워 쓰기도 했다”고 말했다.

에베레스트 등정 성공을 보도한 한국일보 1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에베레스트 등정 성공을 보도한 한국일보 1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태영씨는 이 모든 순간을 글로 담아야 했다. 40년 전에 오지에서 기사 송고를 어떻게 했을까. 그는 “통신 수단은 당연히 없었다. 타이프를 가지고 가서 기사를 작성한 후 현지에서 고용한 메일런너를 통해 남체 바자르라는 마을의 체크포인트(경찰 초소)까지 배달하는 데 이틀, 네팔 카트만두에 있는 AP통신원에게 전달해 그걸 서울로 보내기까지 3~4일이 걸려서야 기사 한 꼭지가 실릴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무너져 내리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빙탑(氷塔)과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산 증세. 죽음과 맞서 싸우는 3개월 간의 사투는 인간 내면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태영씨는 “모두들 욕심도 있고 신경도 날카로워져 보이지 않는 갈등이 표출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놀라운 건 그 모든 장면을 담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7,000m까지 올라간 김운영 선배였다”고 말했다. 이렇게 목숨을 걸고 찍은 사진 운반 작전에 투입된 또 한 명의 ‘용사’가 있었다.

안병찬 당시 본보 외신부 차장이다. 안병찬씨는 “사장 주재로 카트만두에 세운 취재본부로 날아가 김운영 부장에게 필름 행랑을 직접 받아서 인도 뉴델리와 방콕을 거쳐 한국일보 본사까지 1박2일 걸려 운반했다”고 밝혔다. 덕분에 이듬해 본보가 출간한 ‘EVEREST-77한국에베레스트 등반 사진집’에 생생하게 담을 수 있었다.

1977년 9월15일 고상돈 대원이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태극기를 들고 등반 성공을 알리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7년 9월15일 고상돈 대원이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태극기를 들고 등반 성공을 알리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경쟁지 1면에 실리다

18명의 ‘특수 부대’는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정상 등정에 성공하고 돌아와 국가적인 영웅이 됐다. 이태영씨는 “동아일보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로 1면에 명단이 실렸다. 경쟁 관계를 떠나 그만큼 국가적인 대사이자 한국 등반사에 역사적인 일이었다”고 말했다. 나머지 언론에서도 톱기사로 다뤘고, 교과서에서도 등장했다. 10월6일 귀국했을 때는 김포공항에서 서울 시내까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처럼 카퍼레이드를 벌였고 닷새 뒤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로 불러 체육훈장 맹호장을 수여했다. 국회에서도 환영인사가 있었다. 1977년 10월10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 소속 김수한 의원(6선, 전 국회의장)이 의사진행 발언을 통해 “우리 민족의 강인한 의지력과 불굴의 기혼(氣魂)을 세계에 과시한 김영도 에베레스트 원정 대장에게 국민의 이름으로 뜨거운 박수를 보내자”고 말해 의원들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이태영씨의 선친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 손기정 선생의 일장기 말살사건 주인공인 이길용 전 동아일보 기자다. 얼마 전 체육기자연맹은 흉상을 제작해 헌정했다. 1961년 펜을 잡고 1983년까지 본보 체육기자로 한 우물을 판 이태영씨는 대를 이어 체육기자의 정신을 실천했다. 그는 “올림픽 메달리스트 숫자와도 비교할 수 없는 단 18명뿐이다. 9월15일은 산악인의 날이 됐고, 2007년 30주년 때 기념 영화(산악 다큐멘터리)촬영을 위해 그 곳을 다시 찾았다. 이번에도 40주년 행사를 갖게 되었고, 산악 박물관, 고상돈 기념비도 생겼다”면서 “지금도 매년 모임을 갖고 있는데 18명 중 3명은 유명을 달리했고, 4명은 해외에 거주해 절반 정도만 참석 하지만 만나면 그 때로 돌아간다.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한 것”이라고 잠시 눈시울을 붉혔다. 고상돈 대원은 이듬해 북미 최고봉 매킨리 원정 도중 세상을 떠났다. 이태영씨는 “자기 관리를 철저하게 한 사람이었다. 산에 모든 걸 바치고 육신도 바치는 게 꿈이라고 했었다. 매킨리를 오르다 추락사했다는 비보를 접하고 김포공항에서 주검을 맞아 장지로 가는데 착잡하면서도 묘한 감정이 교차했다”고 말했다.

이태영씨는 “에베레스트 등정이야말로 나에게 주어진 행운이었는데 황금으로도 살 수 없는 경험을 했다. 우리나라가 산악인들의 운동장처럼 발전한 데는 그들의 숭고한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성환희기자 hhs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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