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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현장의 목소리

입력
2017.07.20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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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고치면 800만원 밑집니다. 경제도 어려운데 좀 봐주십쇼.” 다급한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날아든다. 공사현장의 목수반장이다. 공사가 도면과 다르게 되어있어 바로잡으려 할 때면 늘 듣는 소리다. “어려우신 건 알지만 저도 어쩔 수 없어요. 다시 고쳐야 합니다. 거긴 그냥 넘어갈 부분이 아닙니다!” 내 목소리도 커진다. “어제도 벽체 틀리셨잖아요. 그건 그냥 넘어갔지만 이건 안됩니다, 절대!” 대화는 좀 더 이어졌지만 서로 입장차이만 확인하고 끝났다. 시공사 대표에게 강력히 항의한 끝에 상황은 강제 종료되었다. 이런 일이 있고 나면 다음날 현장에 가는 것이 망설여진다. 분명 분위기가 좋지 않아 감리 나온 건축가를 고깝게 볼 것이기 때문이다. 어제까지 소장님 반장님 하며 좋던 사이가 한 순간이 어그러진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집을 짓는 일이기 때문이다. 틀리면 절대 안 되는 부분도 있다.

현장에 나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목수반장의 얼굴이 영 좋지 않다. 입을 꾹 다문 그의 눈빛이 이미 살벌하다. 내 목소리는 한층 조심스러워진다. 찬찬히 상황을 점검하다 보니 또 이상한 부분이 있다. 목청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그러자 목수 반장의 입이 드디어 터졌다. 포효! “그것까지 고치라고? 난 못해!!” 아슬아슬한 선이 우리 사이에 그어진다. 아무래도 이번엔 내가 접어야 할 것 같다. 애초에 계약금액이 충분치 않았고 앞으로 이 목수팀과 2개 층을 더 올려야 하는 마당에 계속 으르렁거릴 수는 없다. 현장은 목소리 높은 사람이 이긴다는 말도 있지만, 내게 ‘이기는 것’은 건물이 잘 올라가서 문제 없이 시공되는 일이다. 못내 아쉬운 게 있는지 투덜거리는 목수반장에게 잘 부탁 드린다고 90도로 인사하고 현장을 나왔다. 내일도 일찍 와서 매의 눈으로 샅샅이 살펴보리라. 현장은 목소리 높은 사람이 이기는 게 아니라 질긴 사람이 이기는 법이니까.

이번 현장은 맞은편에도 공사를 하고 있어 이쪽저쪽이 한꺼번에 자재를 내려놓기도 하고 오가는 자동차도 많아서 두세 배는 더 신경 쓰인다. 두 현장 노동자들 사이에도 은근한 신경전이 생긴다. 역시, 사건은 나기 마련이어서 우리 쪽 현장소장과 다른 쪽 건축주와 소장이 한판 붙었다. 이번에는 진짜 목소리 전쟁이다. 역시 목소리를 높고 거칠어야 판에서 주도권을 쥔다. 옮고 그름을 떠나 자존심 싸움이다. 여기서 이기면 기선 제압! 현장 상황이 순조로워진다. 이왕이면 우리 편이 이기는 게 좋지 않겠는가. 다행히 우리 소장이 목소리가 더 크고 이런 싸움에 능하다. 상황을 보니 우리 쪽이 약간 우세한 듯하다. 뭐 크게 차이 나는 건 아니지만.

큰소리로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솔직한 편이라 뒤끝은 없다. 더 무서운 건 조용한 사람들이고 가장 무서운 건 조용한 민원인이다. 현장에 이야기하면 조정될 일도 관청에 민원을 넣어서 공무원으로 하여금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다. 공사소음이 크다, 공사현장을 보고 싶지 않다, 공사하는 건 조망권 침해다, 이것도 불법 저것도 불법이다 등등의 민원은 대부분 현장에 직접 항의 한번 안 하는 조용한 이웃들의 작품이다. 객관적으로 민원을 이해하려 해도 억지인 경우가 종종 있다. 피해가 있었다면 보상을 해야 하지만 납득이 어려울 정도로 과다하게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여태 크게 문제될 민원이 없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이제 막 공사를 시작한 시점이 아닌가.

주택 공사 현장은 큰 목소리가 승리한다는 법칙이 살아있는 곳이지만 변화가 시작되었음을 슬슬 느낀다. 합리적인 토론으로 정확하게 진단하는 것이 문제 해결에 더 유리하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TV 청문회처럼 가장 합리적으로 토론해야 하는 곳에서 ‘큰 목소리 법칙’이 살아있음을 확인할 때는 자괴감이 들지만.

정구원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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