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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싸가지는 있지만

입력
2014.12.3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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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제시장이 개봉 13일만에 450만명을 넘어섰다. 한국 전쟁의 참화를 여실히 보여주는 눈 내리는 함경남도 흥남 부두 피난길에서 시작해 부산 국제시장, 파독 광부, 베트남전쟁, 이산가족 찾기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주요 장면을 이룬다.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이 한국 현대사의 감추고 싶은 순간들을 담았다면, 이 영화는 포레스트 검프처럼 전쟁을 딛고 일어난 승리와 영광의 기록에 가깝다. 특히 주인공 윤덕수(황정민)가 아버지 없는 집안의 가장(家長) 역할을 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는 순간들마다 대부분의 우리 (할)아버지 세대가 겪었을 고난과 슬픔에 눈물겨웠다. 중ㆍ장년층이 볼 만한 영화라는 입소문 덕분인지 평일 저녁의 대형 멀티플렉스 극장 안에는 50, 60대 이상 관객들이 꽤 많았다. 그들이 이 영화에 끌리는 이유가 추억의 감성을 자극하기 때문만은 아닌 듯 했다.

영화는 현실에 기반을 둔 꾸며낸 이야기다. 국제시장에서 보여지는 역사적 사건은 사실이었으나, 그 사건들을 온 몸으로 돌파하는 덕수는 허구이다. 덕수는 북한을 탈출한 한 명의 피난민이자 전쟁으로 비참하게 생을 꾸려가야만 했던 모든 피난민이며, 그 시대를 살아낸 평범한 한국인들의 이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덕수는 당신의 아버지이자, 길거리에서 폐지를 줍는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이렇듯 지금의 청춘들에게 이전 세대들의 피땀 어린 노력과 헌신적인 희생에 대해 공감하게 만드는 점은 국제시장의 미덕이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이 누리는 풍요는 모두 그 때 그 시절 억척스럽게 고생한 그들 덕분이라고 은근히 강조하는 듯한 점은 다소 실망스럽다. 그들의 추억담은 청춘을 향한 훈계였다. ‘너희들이 누구 덕분에 이렇게 먹고 사는지 아느냐?’ ‘이래도 너희들이 우리 말을 따르지 않을 테냐?’ 어쩌면 그것이 지금의 50대 이상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대체적인 생각일 것이다.

소통의 좋은 태도는 아니다. 그들 개개인이 그 시간 속에서 어떻게 살았건 가정을 지키고 국가를 위해 일했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과거는 달콤하게 채색된다. 모든 돌아갈 수 없는 시간 앞에서 과거는 추억으로 아름다운 법이다.

덕수는 우리 아이들이 이런 참혹한 시대를 살지 않아 다행이라고 독백한다. 제 자식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뜨거워 진심으로 울컥거렸다. 눈물이 지나간 자리로, 느닷없이 자식 때문에 혹독하게 곤혹을 치른 아버지들이 떠올랐다. 세월호 유족과 실종자 가족을 향해 국민 정서가 미개하다는 아들을 둔 덕분에 서울시장을 넘어 대통령까지 꿈꾸던 정몽준은 꿈에서 깨어나야만 했다. ‘땅콩회항’으로 국제적인 웃음거리이자 국민적인 공분을 자아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때문에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그룹 전체에 피해를 입히게 됐다. 자식들의 예기치 못한 발언과 행동 앞에서 아비들은 국민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여야만 했다. 반대로 똑똑하고 당찬 아이를 둬서 절규했던 아버지도 있다. 서울시 교육감은 떼에 놓은 당상 같아 보이던 유명 변호사 고승덕은 “고승덕씨는 자신의 자녀 교육에 결코 참여한 적이 없다”는 딸의 페이스북 글로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이 박근혜에게 패배한 주 원인은 50대 때문이었다. 그들은 나라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박근혜에게 투표했다. 이 영화 속 사건들을 경험하거나 기억하는 그들이 우리 사회의 주요 직책을 차지하고 있으니, 지금의 심각한 세대 갈등의 책임에서 벗어나긴 어렵다. 고난의 시기를 살았다는 것을 훈장 삼아 그들은 틈만 나면 젊은 세대를 가르치려 든다. 제 추억을 강요하고, 자기들처럼 살기를 강요한다. 그 말을 거스르면 싸가지 없다고 비난한다. 지금의 청춘들은 이전 세대의 노력과 희생에 대해 감사히 여기고 있다. 다만 미생에서 보여지듯이, 자신의 앞날이 너무 어둡고 불안해 사회 주도층인 그들이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건강한 긴장관계이고 발전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대립이다. 좋은 소통은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제 국제시장 세대가 미생 세대에게 귀를 열 때다.

이동섭 예술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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