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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모 칼럼] 동지는 변하지 않는다

입력
2017.01.10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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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독일어 학원에서 알선해 준 어느 할머니 집에서 하숙했다. 좀 얄미운 분이었다. 내가 한꺼번에 지불한 석 달치 하숙비로 비디오플레이어를 구입하고서는 한참 자랑하셨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녹화할 수 있고 영화 비디오테이프를 빌려다가 볼 수도 있는 신기한 장치라는 것이다. 독일 말을 잘 할 줄 모르니 우리 집에도 비디오플레이어쯤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있었고 심지어 직접 찍는 비디오카메라도 갖고 있다는 말을 당장 해주지는 못했다.

독일 사람들은 요오드 소금을 먹는다. 할머니가 한국 사람도 요오드 소금을 먹느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더니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 건강을 걱정하셨다. 당신들 독일 사람들에게야 요오드가 항상 부족하지만 우리는 미역과 다시마 같은 해초로 요오드를 충분히 섭취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필요 없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독일 말이 달려도 많이 달렸다. 할머니에 대한 얄미운 감정이 점점 커졌다.

마침내 할머니에게 앙갚음할 일이 생겼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한창일 때였다. 마라톤 경기 날을 잊지 않기 위해 달력에 표시를 해놓으려는데, 아뿔싸 방에 달력이 없는 것이다. 독일에 온 지 몇 주가 지나서 간단한 대화는 할 수 있을 때라 “할머니 내 방에 달력이 없네요.”라고 물었다. “이봐 학생, 달력이 얼마네 비싼데 방마다 걸어 놓겠는가? 거실 벽에 있는 것을 보게나.” “어휴, 독일사람 참 힘들게 사는군요. 한국에는 달력은 방마다 있어요. 거의 예술작품이죠. 심지어 화장실에도 달력이 있다고요. 내가 이런 나라에 공부를 하러 왔다니, 참나….”

정말이다. 독일은 달력이 귀하다. 유학 중에는 달력 값이 폭락한 3월경에야 달력을 구하곤 했다. 그런데 지구와 태양 사이의 관계는 일정한데 왜 달력은 매년 바뀌어서 새로 구입해야 하는 걸까. 달력에 근본적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쓰는 달력은 지금부터 2063년 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만들고 1582년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개혁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1896년부터 사용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달력은 불편하다. 한 달, 4분기, 2분기의 길이가 일정하지 않다. 경제 통계를 내는 데도 불편하다. 한 주일이 두 달에 걸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한 해의 첫날인 1월 1일의 요일이 매년 다르다. 그래서 매년 달력을 마련해야 한다. 게다가 새해 첫날인 1월 1일은 천문학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날이다.

역사상 수없이 많은 달력이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천문을 비롯한 자연현상과 결부되어 있었다. 율리우스 달력의 기초가 된 이집트의 태양력에 따르면 나일강이 범람한 다음에 새해가 시작된다. 물론 당시의 역관들은 그때가 정확히 언제인지 백성들에게 알려주었다. 나일강이 범람하기 직전에 큰개자리의 별 시리우스가 태양보다 먼저 떠오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달력의 요일이 매년 바뀌는 까닭은 지구의 공전주기가 7의 배수로 맞아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달의 길이가 31일과 30일로 들쭉날쭉한 까닭은 태양과 지구가 인간의 형편을 봐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정확히 360일에 한 바퀴 돌면 매달 30일로 일정할 텐데 그렇지가 못하다. 지구는 365.2422일에 태양을 한 바퀴 공전한다.

뜬금없이 2월의 날짜가 제일 적은 이유는 지금의 3월(March)이 원래 새해의 시작 달이고 2월(February)이 열두 번째 달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마지막 두 달이었던 January와 February가 처음 두 달이 되면서 March부터 December는 두 달씩 뒤로 밀려났다. 지금의 10월인 October는 원래는 여덟 번째 달이었다. 영어로 octopus인 문어의 다리가 여덟 개인 것을 생각하면 October가 원래 여덟 번째 달이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March에 새해가 시작된 까닭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3월 21일)이 있는 달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낮의 길이가 밤보다 더 길이지기 시작하고 들판의 식물들이 소생하는 달이니 새해로는 적격이었다.

프랑스혁명 세력인 국민회의는 1793년 1월 21일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를 단두대에서 처형하였다. 이어서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하기 열하루 전인 1793년 10월 5일 새로운 달력을 발표했다. 프랑스혁명 달력에 따르면 1년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추분(9월 22일)에 시작된다. 이 달력은 혁명의 실패와 동시에 사라진다. 가장 큰 문제는 일주일의 길이를 7일에서 10일로 바꾼 것이다. 10진법에 집착하느라 민중의 지지를 잃었다. 왕정의 압제 속에서도 6일 일하고 하루 쉴 수 있었던 민중들의 입장에서는 9일 일한 다음에야 겨우 하루 쉴 수 있게 되자 “내가 이러려고 혁명을 지지했는가…” 하는 자괴감이 들고 괴로웠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동지가 새해의 출발로는 적격이었던 것 같다. 동지는 겨울(冬)이 이르렀다(至)는 뜻이다. 밤의 길이가 가장 긴 날이다. 밤이 가장 깊은 시간인 자정에 새로운 하루가 시작하는 것처럼 어둠이 가장 긴 날에 새해가 시작되니까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예전에는 동짓날이 들어 있는 음력 11월을 정월(正月)이라고 불렀으며 동지를 작은설이라고 했다. 동짓날 팥죽을 먹어야만 한 살 더 먹는다고 쳤다. 동지팥죽에 나이만큼 새알심의 개수를 넣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리고 동짓날 서당에 입학했다.

동지는 변하지 않는다. 매년 12월 22일이다. 2016년이나 2020년처럼 4로 나뉘는 해, 그러니까 윤년에만 12월 21일이다. 태양과 지구는 변함이 없지만 사람의 마음은 변하기 마련이다. 변화는 생명의 중요한 특징이다. 따라서 동지(冬至)는 변하지 않지만 동지(同志)는 변할 수 있다. 새로운 동지를 찾을 수 있다. 그래도 정말 궁금하다. “어떻게 동지가 매년 바뀌나?”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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