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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360°] 대학 맞서 ‘첫 승’거둔 ‘이대 나온 여자’들의 싸움

입력
2016.08.0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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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 본관 앞에서 학생들에 의해 훼손된 초대총장 김활란 박사 동상을 직원들이 세척하고 있다. 왕태석기자 kingwang@hankookilbo.com
지난달 31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 본관 앞에서 학생들에 의해 훼손된 초대총장 김활란 박사 동상을 직원들이 세척하고 있다. 왕태석기자 kingwang@hankookilbo.com

‘이대생’은 특별하다. ‘이화여자대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란 일차원적 의미에 머물지 않는다. ‘이대생’은 ‘서울대생’과도, ‘고려대생’과도, 같은 서울 서대문구 신촌에 있는 학교에 다니는 ‘연대생’과도 다르게 인식된다. 인터넷에서 인식은 부정적인 경우가 더 많다. 영화 속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유명한 대사도 그렇다.

한국 여성 혐오의 끝엔… ‘이대생’이 있다

이대생들은 한국 사회 여성혐오의 정점에 서 있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대생’이란 단어에는 한국 여성 전반을 비하하는 ‘된장녀’, ‘김치녀’외에도 페미니스트를 비하하는 의미의 ‘꼴페미’란 단어까지 동의어처럼 따라온다.

졸업생인 신모(28)씨는 “사람들이 이대생을 대할 때 편견을 갖고 대한다는 것을 종종 느낀다”고 말했다. 신 씨는 “내 성격이 사근사근한 편이 아니고 할 말은 다하는 편인데, 다른 학교 학생들과 외부 활동을 할 때 남자 선배들이 ‘너는 왜 이렇게 기가 세냐’, ‘딱 너는 꼴페미 같다’고 비아냥거렸다”고 말했다. 신씨는 “오랫동안 ‘내가 정말로 공격적인가’에 대해 고민을 했는데 학교에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언니들이 ‘그런 말에 신경 쓰지 마라’고 다독여줘 고민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역사적으로도 이대생들은 오랫동안 ‘사치하는 여대생’의 전범이자 훈계의 대상, 심지어 남학생들의 폭력의 희생양이었다.

근대 문학과 신문기사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대생들은 부르주아 사치녀로 등장해 눈총을 받았고, 고려대 남학생들은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까지 이대의 학교 축제 때 떼지어 몰려와 난동을 피우고 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지난달 25일 중단된 신촌지역 대학생들의 커뮤니티 ‘타임테이블’의 서비스 중단 사건에서도 현재까지 이어져 온 이대생에 대한 공격을 확인할 수 있다. 2006년부터 서비스를 운영한 타임테이블에의 익명 커뮤니티에서는 초기부터 여성혐오적인 발언과 여대(특히 이화여대)에 대한 조롱, 음담패설이 빈번하게 올라왔다. 10년 가까이 이어진 혐오발언에 맞서 이를 ‘미러링’해 성별을 바꾼 게시글들이 올라오자 나흘 만에 운영자가 서비스 중단을 선언했다.

사회에서 이대생에 대한 편견을 확대ㆍ재생산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학생들은 이대에서 오히려 자유로움을 느꼈다고 말한다. ‘이대생은 명품을 밝힌다’라는 편견과 달리 오히려 서로 남의 옷차림에 무관심했고, 외모를 노골적으로 품평하는 등의 성적 대상화에서도 자유로웠다는 것. 대신 이들은 일찍부터 여성주의와 주체적 삶에 대한 고민에 눈 떴다. 신씨는 “지난 5월 강남 살인사건 이후 사회적으로 여성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학교 내에는 이미 여성주의에 대한 자각이 널리 퍼져있었다”며 “2,3학년에게는 여성학 수업이 수강신청을 못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13일 오후 서울시 서대문구 이화여대에서 열린 '2016학년도 대학입시 설명회'에 참석하는 수험생과 학부모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해 11월 13일 오후 서울시 서대문구 이화여대에서 열린 '2016학년도 대학입시 설명회'에 참석하는 수험생과 학부모들. 한국일보 자료사진

“여성 해방하겠다던 대학에서 뷰티 웰니스라니”

지난달 28일부터 수면위로 떠오른 이화여대의 직장인 대상 평생교육 단과대학(미래라이프대학) 설립 계획과 학생들의 반발로 이어진 농성을 “이대 나온 여자라는 간판을 지키려는 엘리트주의”로 바라보는 일부 시각 역시 이대생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반영한 측면이 있다.

“고졸 여성이 이대 졸업장 받아서 브랜드 가치가 떨어지는 게 걱정되냐”는 비판에 많은 이대생들은 “직장인이나 고졸 여성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에 반대하는 게 아니다”라며 항변한다. 졸업생 민모(33)씨는 “애초에 재단 적립금 1위에다 등록금이 제일 비싼 이대가 인문대를 통폐합하고 강사 수를 줄이면서 교육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비판이 높았다. 그런데 학기당 500만원의 등록금에 면접만 보면 입학해 학위가 나오는 단과대학을 만들어 학벌주의를 조장하고 돈벌이에 열을 올리는 것에 분노한 것”이라고 말했다.

미래라이프대학에서 가르치는 과목도 논란이 됐다. 학교와 학생들의 대치가 시작됐던 지난달 28일 오전 본관에서 미래라이프대학 사업에 관여한 한 교수에게 학생들이 “(뷰티, 헬스, 요가, 다이어트 등의 과목을 포함하는) 웰니스 학과가 이화의 방향성과 다르다”고 항의하자 교수는 학생들에게 “학과선정에서 다른 학교의 전공과 겹치지 않는 것을 우선 고려했고, 그 중에서 여대 특성을 고려해서 웰니스나 뷰티로 잡은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학생들의 반발을 샀다. 이대생들은 “누군가의 딸이나 아내가 아닌 주체적인 여성으로써의 삶을 강조하는 이대가 오히려 성 역할을 고착화하는 과목으로 학위장사를 하려 한다”고 분노했다.

3일 오후 대학 본관에서 농성을 벌이던 이화여대 학생중 한 명이 최경희 총장의 미래라이프대학 설립 철회 발표 후 최 총장에게 발언하고 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3일 오후 대학 본관에서 농성을 벌이던 이화여대 학생중 한 명이 최경희 총장의 미래라이프대학 설립 철회 발표 후 최 총장에게 발언하고 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마스크 쓰고 외부연대 거절하고… 새로운 싸움

미래라이프대학 설립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농성은 기존 학생들의 싸움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였다. 학생들의 농성은 주동자 없이 이어졌고, 총학생회가 전면에 나서지도 않았다. 언론 질문 대응도 내부토론을 거쳤다. 이러한 싸움에 필수적이던 다른 대학들의 연대 성명 발표도 이번엔 없었다. 기자회견에 나온 학생들은 모두 짙은 선글라스와 마스크, 야구모자로 얼굴을 철저히 가렸다.

이는 싸움을 저지하는 세력들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방식이었다. 강신명 경찰총장이 본관 점거농성 주동자를 엄정하게 사법 처리하겠다고 밝히자 이들은 “우리가 모두 주동자”라고 맞섰고, 최경희 총장이 기자회견에서 “점거 농성을 벌인 학생들이 우리 학생들 같지 않다”며 ‘외부세력 개입론’을 들고나오자 “우리는 모두 이대생”이라며 받아쳤다. 오랜 경험으로 이대 관련 보도에 등장한 이대생의 얼굴은 인신공격, 신상털이, 성희롱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체득한 이들은 마스크를 쓰고 얼굴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공격 당할 여지를 차단해버렸다.

이들의 새로운 동력은 재학생, 졸업생들간의 끈끈한 연대였다. 졸업생들은 ‘농성의 배후’를 색출하려는 시도에 “우리가 배후다”라며 나섰다. 민씨는 “동문 단체 카톡방에 초대를 받아 이 문제에 대해 많은 의견이 활발히 오갔다”며 “졸업생들은 농성중인 재학생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지원하고 신문 광고를 내기 위해 모금을 했다”고 말했다.

3일 밤 이화여대 재학생과 졸업생 1만여명이 최경희 총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이화여대 정문에서 본관으로 행진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3일 밤 이화여대 재학생과 졸업생 1만여명이 최경희 총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이화여대 정문에서 본관으로 행진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이대생의 ‘승리’가 갖는 의미

결국 최경희 총장은 3일 오전 미래라이프대학 설립 계획을 취소하겠다고 발표했다. 재학생과 졸업생 1만여명은 이날 밤 학내에 경찰 경력을 요청했던 최경희 총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학교를 행진했다.

이대생의 이번 승리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된다. 하나는 지난 3일 ‘언니 왔다’, ‘우리는 항상 함께였다’는 팻말을 들고 행진했던 이대 재학생과 졸업들이 ‘여성공동체 연대’(트윗링크보기)의 사례가 됐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미 너무나 공고화돼서 누구도 되돌릴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지 못했던 대학의 시장종속화에 맞서 거의 최초로 승리를 거뒀다는 사실이다. 대학교육연구소의 김삼호 연구원은 “이대는 지난해 말부터 프라임 사업 등 정부 사업을 받아 오면서 한번도 학생들과 소통을 한 적이 없어서 내부적 불만이 누적된 상태였다가 이번에 터진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순혈주의 논란도 있었지만, 정부 사업을 따내려는 대학의 계획을 학생들이 반대해서 되돌린 사례는 내가 알기론 처음이었다”며 “이대생들의 의미 있는 승리”라고 말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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