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표향 기자

등록 : 2017.08.12 18:13
수정 : 2017.08.12 18:52

‘군함도’ 이정현 “위안부 피해자, 강인하게 그리고 싶었다”

등록 : 2017.08.12 18:13
수정 : 2017.08.12 18:52

영화 ‘군함도’에서 일본군 위안부 말년을 연기한 이정현은 “관객들이 가슴 아픈 역사를 잊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가슴에 상처를 품고도 당당하고 용기 있게 시련에 맞서는 모습이 강렬하게 다가왔어요.” 배우 이정현이 영화 ‘군함도’에서 만난 말년의 첫 인상을 떠올리며 살짝 벅차 올랐다. 말년은 위안소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고 급기야 강제 징용돼 일본 하시마(군함도)의 유곽에까지 내몰렸지만 질기게 삶을 살아내는 여인이다.

그의 상처투성이 몸과 형형한 눈빛이 시대의 야만을 증언한다. 이정현이 연기해서 말년이 원래보다 더 강인해진 것 같다.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마주한 이정현은 “말년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말년은 유곽에서 조선 소녀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요. 어떠한 억압에도 굽히지 않죠. 마지막엔 조선인들의 탈출을 돕기 위해 일본을 향해 직접 총을 겨누잖아요. 어쩌면 위안부 피해자들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엄혹한 현실과 싸워 온 분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위안부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분은 류승완 감독님밖에 없을 거예요.”

이정현은 말년의 슬픔에 깊이 동화됐다고 한다. 말년이 어떻게 위안소로 끌려갔는지 칠성(소지섭)에게 이야기하던 장면에서 특히 가슴이 아렸다. 촬영을 앞둔 어느 날 류 감독이 다큐멘터리를 보내 왔다. 영상 속 위안부 피해자들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대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울부짖지 않아서 오히려 더 큰 슬픔이 전해져 왔다. 이정현도 감정을 눌렀다.

책임감도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스스로 살을 뺐다. “실제 증언을 보면 당시 위안부들은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수모를 당했다고 하더라고요. 말년을 현실적으로 그려내야겠다고 다짐했죠. 신체검사를 하는 장면에서 갈비뼈가 보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는 3~4분 정도의 장면이지만, 저에겐 의미가 남달랐어요.” 그 작은 체구에서 덜어낼 살이 있을까 싶은데, 무려 7kg을 감량해 촬영 중엔 몸무게가 36kg까지 내려갔다고 한다.

이정현은 “식사 시간에는 다이어트 식단이 따로 제공됐다”며 “주연 배우는 물론이고 조단역 배우들까지 사실성 있는 연기를 위해 살을 뺐기 때문에 나만의 특별한 노력은 아니었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군함도’의 말년은 하시마의 유곽에 끌려온 소녀들을 보살피며 일본에 맞서는 인물이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이정현은 사투리 연기에도 공을 들였다. 시나리오에는 표준어 대사였는데 이정현이 먼저 사투리를 쓰겠다고 제안했다. “표준어를 하면 말년이 예뻐 보일 것 같았어요. 그래서 사투리 선생님께 열심히 배웠죠. 욕도 입에 착착 달라붙을 때까지 연습했고요. 그런데도 후시 녹음을 두 번이나 다시 해야 했어요. 사투리 연기가 그렇게 힘들 줄은 몰랐어요.”

배우들은 카메라 앞에서 열정을 쏟았고, 카메라 밖에선 마음을 나눴다. 촬영 이틀 전부터 강원 춘천의 세트장에 내려와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살폈고, 촬영이 끝나도 돌아가지 않고 마무리를 함께했다. “촬영장에 오면 조단역 배우들까지 상황에 완벽하게 몰입이 돼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저 역시 자연스럽게 말년에 빠져들었어요. 촬영할 땐 다치는 줄도 모르고 연기했죠. 숙소에 돌아와 뒤늦게 상처를 발견하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더라고요 (웃음).”

이정현은 도전적인 배우다. 그의 출연작이 말해준다.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하층 노동자 수남과 ‘명량’의 정씨 여인, ‘범죄소년’의 미혼모 효승, ‘파란만장’의 무녀 등 범상치 않은 작품과 캐릭터들로 필모그래피가 채워졌다. ‘군함도’의 말년도 결코 쉬운 역할은 아니다.

“그간 독특한 캐릭터에 재미를 느꼈던 것 같아요. 지금 아니면 언제 해보겠냐는 생각도 있었고요. 돈을 쫓았다면 중국 활동에 더 매진했겠죠. 하지만 저는 촬영할 때 행복한 게 더 중요해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순수 제작비 6,000만원이 들었고, ‘군함도’는 220억원이 들었어요. 그런데 두 영화에서 제 행복지수는 똑같았어요.”

앞으로도 역할과 작품 규모에 상관 없이 즐겁게 일하는 것이 유일한 바람이다.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선 재능기부 형식으로 출연료도 받지 않았고 스태프들의 아침밥까지 챙겼던 그다. “제작비가 1,000만원이든 500만원이든 중요하지 않아요. 열정적인 사람들과 함께 영화를 만드는 것만으로 저는 얻어가는 게 아주 많은 걸요.”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독특한 퍼포먼스로 사랑받은 가수이기도 한 이정현은 “가수 생활을 그만둔 건 아니다”라며 “연기를 열심히 하다가 적당한 기회가 생기면 좋은 음악도 들려드리겠다”고 말했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국일보 페이스북

한국일보 트위터

한국일보닷컴 전체기사 RSS

RSS

한국일보닷컴 모바일 앱 다운받기

앱스토어구글스토어

한국일보닷컴 서비스 전체보기

Go

뉴스 NOW

이전

  • 종합
  • 정치
  • 사회
  • 경제
  • 국제
  • 문화
  • 연예
  • 라이프
  • 스포츠

다음

[단독] 박근혜 청와대, 포털 압박해 여론 통제 시도했다
[단독] 수업도 빠진 채... ‘신입생 영업’ 나서는 특성화고 학생들
[단독] 군 장성 진급 보장 ‘별자리’ 따로 있다
‘호스피스 병동=치료 포기하고 죽으러 가는 곳’ 편견 깨다
[단독] 횡령죄 건국대 이사장 퇴임 전 연봉 1억 올려
전력마저 자급자족...北 접경마을서 태양광 패널 관측
[이제는 사람중심 경영이다] 아이스크림 회사 ‘벤 앤 제리스’의 스위트 경영

오늘의 사진

많이 본 뉴스

  • 1
  • 2
인터랙티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