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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무엇을 이루든 숭고한 인생이다

입력
2017.11.13 1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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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미숙(가명) 할머니는 천안의 어느 학교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고 있다. 할머니는 마흔 넘은 아들과 함께 산다. 아들의 부양을 받는 게 아니라, 몸이 불편해서 사회생활을 할 수 없는 아들을 뒷바라지하고 있다. 할머니는 생계를 위해 일을 꼭 해야 하는데, 언제 그만두게 될지 모르는 고용의 불안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이어가는 중이다.

할머니에게는 결혼이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 어린 시절은 지극히 행복했다. 부모의 든든한 그늘막 아래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매일 웃음꽃이 피었던 그 시절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열일곱 소녀 시절에 동네 오빠와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더 많은 공부를 할 수 없었던 소녀와는 달리 그 오빠는 집안이 좋았다. 소녀의 아버지는 집안의 격차가 크다고 둘의 만남을 가로 막았다. 부모의 반대를 이길 자식은 거의 없던 시대다. 이후 스물 셋의 처녀가 되었을 때 어머니의 독촉으로 선을 보았다. 인상이 좋지 않아 거절했지만 부모님은 네 팔자라고 생각하라며 결혼으로 몰아 갔다. 고작 세 번을 만난 사람과 식을 올렸고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첫 아이를 낳고 남편은 도무지 일을 하지 않았다. 생계를 책임진 할머니는 자식들을 굶길 수 없어서 온갖 일을 찾아 나섰다. 부지런히 모은 돈으로 집 한 채 장만하려는 꿈에 부푼 순간, 남편은 도박과 병치레에 그 돈을 써버렸다. 망연자실 주저앉아 있는 것도 사치였다. 눈 앞에 보이는 모든 일을 했다. 그때는 젊었다. 젊은 날들을 기꺼이 내주니 또 다시 집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사를 앞둔 날의 기쁨은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잔인한 운명은 할머니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사한 지 얼마 안되어 막내 아들은 교통사고를 당했고, 할머니는 집 앞에서 뺑소니 사고로 크게 다쳤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본 딸은 한동안 제정신으로 살 수 없었다. 온 식구들의 병원비로 그 집도 팔아 치웠다.

책임감 없던 남편은 60세를 살고 세상을 떠났다. 그전에 이혼을 생각 안 해본 건 아니다. 끝까지 가정의 모습을 지킨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결혼을 하고 누군가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 정말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어. 어머니가 되면 자식들을 위해 나 자신은 금방 포기하게 돼.” 할머니에게 남은 생애의 소원은 뭐냐고 물어보았다. “막내 아들의 몸이 나아서 독립을 하고, 큰아들과 딸이 잘 살기를 바라고…” 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멈칫하던 할머니는 그것으로 말을 매듭지었다. 결국 자신을 위한 소원은 말로 나오지 않았다.

희생의 삶이 위대한 삶은 아니다. 다만 누군가를 생을 바쳐 사랑했던 그 시간의 축적이 위대한 것이다. 할머니의 삶을 고등학생 몇 명이 기록에 남겼고 그것은 책이 되었다. 충청남도학생교육문화원에서 추진한 세대공감 자서전 써드리기 사업이다. 나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자서전 전달식 진행자로 참여했다. 대필 작가로 참여한 한 학생의 말이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무엇을 이루든 한 사람의 인생이란 이렇게 소중하고 숭고한 것이구나 싶어요.” 자식을 향한 소원 말고 할머니만의 것은 뭐냐고 다시 물었더니, ‘안정된 일자리’라고 답했다. 역시나 막내 아들을 염두에 둔 답변이었다. 관객들은 할머니에게 진심 어린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다른 인생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의 경사를 두는 것은 왜 필요한가. 내가 남의 인생을 인정하지 않으면, 내 인생도 한낱 먼지가 되어버린다. 반면 내가 남의 인생을 숭고한 것으로 바라보기 시작할 때, 비로소 내 인생은 아득한 지평선이 생긴다. 내가 끝없이 문학작품을 읽는 이유는 단 하나다.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의 구체적인 인생이 지극히 높고 크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제갈인철 북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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