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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빈약한 토대에서 다작 만들면서도 개성 잃지 않았던 존재감 영원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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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빈약한 토대에서 다작 만들면서도 개성 잃지 않았던 존재감 영원할 것

입력
2018.04.19 04:4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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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희 주연의 1961년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한 장면.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최은희 주연의 1961년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한 장면.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생전의 신상옥(1926~2006) 감독은 최은희(1926~2018)가 주연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를 가리켜 “한국영화계에서 처음 리듬을 갖추게 된 영화”라고 자평하곤 했다. 신상옥과 최은희의 대표작인 이 영화에서 최은희의 단아한 자태와 말을 아끼는 가운데 시선으로 많은 것을 표현하는 연기력이 돋보이지 않았다면 화면과 화면을 간결하게 이어붙이는 신 감독의 연출 스타일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가 나온 1961년은 최은희에게 배우 인생 최절정기의 작품들이 쏟아져 나온 해이기도 했다. 신 감독이 연출하고 한국 최초로 컬러필름을 쓴 최은희 주연의 ‘성춘향’은 영화계 일반의 예측과는 달리 당시 절정기에 있던 홍성기 감독, 김지미 주연의 ‘춘향전’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흥행함으로써 오늘날의 방송국 규모와 맞먹는다고 하는 거대 영화사 신필름의 시대를 열었다. 역시 같은 해에 나온 ‘상록수’는 박정희 정권의 국책에 보조를 맞추는 목적성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수일한 완성도를 갖춰 당대의 농촌 삶을 세세하게 묘사한 장점이 돋보였다. 이들 영화에서 최은희는 한국의 전통적 미인상을 스크린에서 증명하는 한편 거세고 단단한 내면을 갖춘 여성의 이미지를 시연했다.

1947년에 영화배우로 데뷔한 최은희는 1953년 ‘코리아’에 출연하면서 신 감독과 처음 인연을 맺었는데 이후 신 감독과 결혼하면서 두 사람이 함께 걸었던 영화인생은 그 자체로 한국영화사의 주요 흐름을 만들었다. 최은희가 신 감독과 함께 한 1950년대의 작품들, ‘꿈’(1955), ‘젊은 그들’(1955), ‘지옥화’(1958),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 등에서 최은희는 자연주의에 가까운 작풍을 지닌 신 감독의 영화에 절대적으로 어울리는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줬다. 이 시기의 영화에서 특기할 것은 이후 최은희의 배우 이미지로 곧바로 떠올리게 되는 전통적인 미인의 이상형이라는 통념과는 달리 현대적이고 자립적이며 전근대적인 사회 시스템에 맞서는 불굴의 여성으로 스크린에 자리했다는 점이다. 이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잔상이 워낙 강했던 탓에 은근하게 감춰져 있던, 최은희의 영화배우로서의 독보적인 이미지이며 ‘로맨스그레이’(1963), ‘쌀’(1963), ‘빨간 마후라’(1964) 등 1960년대 이후의 영화들에서도 일관되게 구현됐던 이미지이기도 하다.

1965년에 최은희가 직접 감독한 ‘민며느리’는 그런 최은희의 성향을 십분 발휘한 수작인데 남편이자 제작자였던 신 감독은 “최은희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놔두고 하고 싶은 것을 했다”라고 폄하했지만 ‘공주님의 짝사랑’(1967), ‘총각선생’(1972)등의 후속 연출작에서 증명한 대로 최은희의 연출 역량은 준수한 것이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한국영화계가 불황에 빠지고 신 감독이 박정희 정권과 불화하면서 몰락하기 시작한 신필름의 형편에 따라 최은희의 배우 커리어도 침체기에 빠졌다. 1978년 홍콩에서 납북된 후 1980년대에 신상옥 연출로 만들어진 17편의 북한영화에서 최은희는 다시 전성기를 맞이했는데 1930년대 경향문학을 원작으로 리얼리즘에 힘을 준 작품들로 ‘탈출기’(1984), ‘소금’(1985) 등의 영화에서 최은희는 예의 그 아름다우면서도 억센 기운을 강렬하게 풍기는 캐릭터를 연기한다.

최은희는 빈약한 물적 토대에서 다작을 양산하며 버텨야 했던 영화현장의 악조건 속에서도 자기 개성을 잃지 않은 드문 능력의 소유자였다. 사극과 현대극을 망라하면서 전통적인 외형적 아름다움과 더불어 거센 현대여성의 내면을 장착한 최은희의 존재감은 길이 기억될 것이다.

김영진 명지대 영화뮤지컬학부 교수ㆍ전주국제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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