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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천조국'이 부러운 진짜 이유

입력
2017.03.12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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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 젠킨스 감독이 지난달 26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89회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은 뒤 트로피를 들고 기뻐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배리 젠킨스 감독이 지난달 26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89회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받은 뒤 트로피를 들고 기뻐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윌리엄 헨리 게이츠 3세. 있는 듯 없는 듯 살다간 영국 어느 왕의 이름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위엄이 서린 이 호칭은 빌 게이츠의 정식 이름이다. 이름에서 풍기듯 게이츠는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저명한 변호사였고, 어머니는 금융회사의 이사였다. 게이츠의 하버드대학 후배 마크 저커버그의 남다른 삶도 잘 알 것이다. 치과의사 아버지와 정신과 의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저커버그의 성장 환경은 게이츠가 부럽지 않다. 아버지의 영재교육으로 어려서부터 소프트웨어를 공부하고 당연하다는 듯 하버드대에 입학했다. 대학 중퇴 뒤 지금까지의 삶은 게이츠의 성공 신화를 연상시킨다.

게이츠와 저커버그의 휘황한 삶을 돌이켜보자면 영화감독 데이미언 셔젤이 떠오른다. 지난달 열린 제89회 미국 아카데미영화상(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사상 최연소(32세)로 감독상을 수상한 그는 명문대 교수 부모를 두었다. 하버드대를 졸업한 뒤 영화계에 뛰어들었다. 그의 첫 장편영화 ‘위플래쉬’는 2015년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J .K. 시몬스) 등 3개 상을 받았다. ‘라라랜드’로 올해 아카데미상 6개 부문을 수상하며 셔젤의 젊은 신화가 완성됐다. ‘위플래쉬’와 ‘라라랜드’로 쌓은 재산이 벌써 700억원이 넘는다니 영화계의 게이츠, 저커버그라 불러도 무방하다. 부모의 후원이 영상과 음악에 능통한, 드문 인재를 만들었으리라.

게이츠와 저커버그와 셔젤의 인생 궤적은 경외보다는 질투를 유발한다. 이들이 강한 경제력과 월등한 지성까지 갖춘 부모의 보호와 지도를 등에 업고 세상살이를 남들보다 수월하게 개척한 것 아니냐는 생각 때문이다. 평범한 동년배보다 10m 앞에서 100m 달리기 경주에 나선 느낌이라고 할까. 그들의 성공이 99%의 부모 재력, 1%의 영감으로 이뤄졌다고 평가절하하면 지나친 것일까. 범상치 않은 세 사람의 재능과 노력은 존중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미국 사회도 결국 부와 사회적 지위가 대물림되고 계층이 고착화 된 곳 아닌가 우려할 만하다.

정말 그럴까. ‘문라이트’로 올해 아카데미상 작품상과 각본상을 받으며 시상식의 주인공이 된 배리 젠킨스 감독의 지난 삶을 되짚어봤다. 젠킨스는 미국 마이애미의 가난한 동네에서 나고 자랐다. 12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마약중독자였다. 어려서부터 위탁 가정에서 자랐다. 침실이 두 개인 집에서 비슷한 처지의 아이 예닐곱과 함께 지냈다. ‘문라이트’의 주인공 샤이론의 삶을 빼 닮은 어린 시절이었다. 젠킨스는 “음식은 보통 있었으나 가끔 없기도 했고, 전등이 평소 켜지긴 했으나 가끔 켜지지 않기도 했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빈곤층 자녀를 위한 장학금으로 플로리다주립대에 입학했다. 떠돌이로 자라 영화를 제대로 접하지 못했던 젠킨스는 대학에서 영화에 눈을 떴고 영화를 전공키로 했다. 불우한 성장 환경은 그의 마음까지 잠식했다. 그는 “나는 가난하고 흑인이고 마약중독자 엄마를 뒀는데 과연 영화를 잘할 수 있을까”라고 자문했다고 한다.

젠킨스는 2008년 저예산장편영화 ‘우울증 약’으로 데뷔했으나 영화계 주변을 맴돌았다. ‘문라이트’의 메가폰을 잡기 전 그는 콜로라도주의 소도시 텔루라이드에서 열리는 영화제 스태프로 일했다. 행사 사회나 화장실 청소, 장내 정리 등 잡다한 일이 그의 몫이었다. 아카데미상 역사에서 작품상 후보에 오른 네 번째 흑인 감독이고 작품상을 받은 두 번째 흑인 감독(미국인 흑인으로는 처음)인 인물의 이력치곤 초라하다.

무엇이 ‘젠킨스의 기적’을 가능케 했을까. 그가 꿈을 향한 사다리를 올라갈 때 허술한 듯한 사회복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불우아동을 위한 위탁 보육이 없었다면, 불우학생을 위한 장학금이 없었다면 관객들은 ‘문라이트’를 마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금수저든 흙수저든 신화와 기적을 일굴 수 있는 사회, ‘천조국’이 부러운 진짜 이유다.

라제기 문화부장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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