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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메리 애닝(3월9일)

입력
2018.03.09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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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보적 화석 수집 상인 메리 애닝은 19세기 전반기 유럽 고생물학 발전에 획기적으로 기여한 실질적 고생물학자였다.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독보적 화석 수집 상인 메리 애닝은 19세기 전반기 유럽 고생물학 발전에 획기적으로 기여한 실질적 고생물학자였다.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화석은 고생물학과 지질학의 처음이자 끝이다. 인류는 화석을 통해 지구 역사 곧 지질시대의 구분이 가능해졌고, 시대별 생물 종의 형태와 습성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화석은 진화 연구의 주요 대상이자 진화론의 결정적 증거도 된다. 고생물학자에게 새로운 화석을 얻는 것은 그 자체로 중요한 업적이자 새로운 연구의 시발점이어서, 한동안 화석 발굴 사실을 비밀에 부치며 연구 기회를 독점하기도 한다.

영국인 메리 애닝(Mary Anning, 1799.5.21~ 1847.3.9)은 화석 발굴 분야의 독보적인 여성이었다. 잉글랜드 남부 도싯 주 해안 라임리지스(Lyme Regis)에서 태어난 그는 마을 블루 라이어스(Blue Lias) 퇴적 절벽의 화석 수집 및 공급업자로 19세기 영국을 비롯한 유럽 고생물ㆍ지질학 발전에 획기적으로 기여했다.

라임리지스는 18세기 말 프랑스혁명 전쟁의 여파로 유럽 여행이 힘들어진 영국 젠트리 계층 부유층들이 즐겨 찾던 해안 휴양지였다. 마을 주민들은 쥐라기 지층 화석을 주워 관광객들에게 판매해 쏠쏠한 소득을 얻곤 했다. 가구업자였던 메리의 아버지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는 어린 메리와 오빠(조셉)를 데리고 다니며 화석을 줍거나 캐곤 했다. ‘뱀돌’이라 불린 암모나이트 화석, ‘악마의 손가락’이라 불린 ‘벨렘나이트 화석 등이 주요 상품이었다. 메리가 11살이던 1810년 아버지가 숨지면서 메리 남매는 그 ‘가업’을 이어받았고, 얼마 뒤 오빠가 가구업에 전념하면서 그 일은 메리의 일이 되었다.

메리는 남달랐다. 그는 비가 잦아 퇴적 절벽이 약해지는 겨울철, 다시 말해 벼랑에 매달려 화석을 채취하기 위험할 때가 좋은 화석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란 걸 알았고, 그 기회를 십분 활용했다. 그는 10대 초반부터 어룡의 일종인 이크티오사우르스 화석 등 거의 완벽한 해양생물 화석들을 무수히 수집했고, 화석의 가치를 알아 더 좋은 값을 받기 위해 스스로 고생물학을 익혔다. 그는 학자들과 토론을 벌이거나 논문의 오류를 지적하기도 했다고 한다.

비록 학자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당대의 빼어난 학자들은 그를 존중했고 실질적으로 그의 영향력 하에서 연구를 수행했다. 그는 가장 앞선 고생물학자 중 한 명이었다. 영국 왕립학회는 2010년 과학사가 기록하지 않은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과학자 10인의 명단에 그를 넣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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