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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대선의 추억

입력
2017.05.02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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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은 유독 길었다. 개표 방송만이 목소리를 내는 스튜디오 주변에서, 누군가의 조곤조곤한 어조가 불편한 정적을 깼다. “이제 우리 회사의 뉴스 시청률은 3%대로 추락하게 될 거야. 그리고 종편하고 경쟁하게 되겠지”. 방송 일에 투신한 지 20년 차가 넘은 PD분이었다.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면서 그분이 말을 이었다. “사실 이 회사에 들어와 일을 하면서, 그간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아 왔어요. 이렇게 좋은 대우를 받아 왔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공정하고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시청자들께 보답을 해야 하는데…” 자연스레 밴 우아한 겸손이 그가 살아온 삶을 대신 말해주는 듯했다. 그리고 그가 앞으로 계속 마주하게 될 강퍅하고 낯선 삶도. 침묵이 다시 이어졌다.

2012년, 그 한 해 동안 있었던 여러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데이터 사이언스 업을 하면서 언론에 사회여론을 다루는 분석 결과를 내다보니, 정치권에 있는 사람들도 만나게 되었다. 여권에서도, 야권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왔다. 국회에서 둘로 나뉘어 몸싸움만 하는 이미지와 달리, 권력의 핵심에서 두뇌 역할을 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의 생각과 논리에 대해서도 유연한 편이었다. 어쩌면 그들이 어느 한 편을 택해 반대편과 싸우게 된 것은 신념 때문이 아니라, 우연한 운명 탓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데이터 사이언스가 새로운 여론 분석에서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동일하게 설명해 줬다. 사람들의 정치적 지향이 점차 분화되고 있으니 다양성을 포착할 수 있는 심층 데이터 분석을 통해 국민의 의견을 보다 다원적으로 대변하고 전략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모두 나를 존중했지만, 정작 새로운 데이터를 새로운 방법론으로 심층 분석해 보고자 하는 정치 주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같이 일했던 주간지 기자와 함께 쌈짓돈을 털어 최소한의 조사를 해 보았다. 스윙 보터들을 연령과 계층으로 나누어 그룹별로 인터뷰를 하고, 그들의 녹취록을 사회심리 모델에 기초한 컴퓨터 알고리즘으로 분석했다. 몇 가지 특성이 통념을 흔들었다. 20대 저소득층 젊은이들은 박근혜 후보가 카리스마와 능력이 있는 지도자라고 생각했다. 50대 저소득층 장년층은 기존 체제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그간 고되게 열심히 살아온 자신의 삶이 권위로부터 인정받기를 바랐다. 그들 모두에게서 살면서 경험하지 못한 신뢰와, 학습된 무기력을 느꼈다. 40대 이상 상위 소득층은 똑똑한 리더십과 인간적인 공동체에 대한 열망이 컸다. 일부러 우문을 던져봤다. “선생님들은 다들 자수성가하셨으면서, 왜 힘 있는 쪽 편을 안 드시고 못사는 사람들 걱정을 하십니까?” 평소 그런 질문에 익숙한 듯, 개중 누군가가 씁쓸하게 웃으며 답했다. “제가 잘 살고 있는 것은 마냥 제가 잘해서가 아니거든요. 다른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도와 주어서인데, 그 사람들이 계속 못살게 되면 이 나라는 지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현명한 그의 대답은 칠흑 같은 어둠 속의 반딧불처럼 외로웠다.

분석 결과의 일부를 언론매체에 내는 것으로 나는 내 사회적 소임에 대한 체면치레를 했노라 자위했다. 당시 야권의 캠프에선 과학적인 데이터 분석 따위가 왜 필요하냐, 안철수와 단일화 흥행만 잘하면 승리는 떼 논 당상이라고 호언장담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우리 회사의 모니터에서는 쉴새없이 여론 조작을 해대는 네트워크의 노드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춤을 추고 있었다. 그 후로 4년의 세월이 흘렀다. 또 다른 호언장담은 여전하고, 국민의 다원적이고 심층적인 마음 밭에는 관심들이 없어 보인다. 그때 만났던 님들의 침묵이, 외로운 추억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다.

김도훈 아르스프락시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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