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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의 유행어 사전] 협치

입력
2016.07.26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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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총선 이후 새누리당이 원내 다수당이 되지 못하자 한국의 지배 엘리트 집단 및 보수 언론이 야당들을 포획하기 위해서 펼쳐 내던진 정치적 그물 내지는 덫이다. 협치(協治)는 영어 거버넌스(governance)의 번역어로 만들어졌다. 협치란 말이 정착하기 전까지 공치(共治), 망치(網治), 국정 관리 등과 같은 말이 쓰이기도 했다.

거버넌스라는 말 자체는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협치라는 의미에서의 거버넌스는 거번먼트(government), 즉 정부 내지는 통치란 말과 대비되면서 정치학, 행정학 등의 분야에서 쓰이기 시작했다. 즉, 정부에 의한 일방적인 통치 대신에, 일반 시민 및 비정부ㆍ비국가 행위자가 실질적으로 통치 과정에 참여하고 또 이 과정에서 정부와의 대등한 협력을 이뤄나간다는 게 협치의 핵심 아이디어다.

비정부ㆍ비국가 행위자란 시민 사회, 그러니까 지역 주민일 수도 있고, 동네 마을일 수도 있고, 시민 단체일 수도 있고, 전문가 집단일 수도 있다. 사드 문제에 관한 한 성주 지역 주민이 바로 협치의 핵심 당사자이다. 한편 거버넌스란 말이 기업의 지배구조에 관해 쓰일 때는 대주주나 경영자 집단만이 아닌 고용 노동자, 소액 주주, 소비자, 기업이 있는 지역 주민 등 기업의 이해 당사자 전체를 포함하게 된다. 요컨대, 거버넌스는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현해보자는 의도에서 제안된 것이다.

하지만 요즘 보수 언론이 사설 등에서 사용하고 있는 협치의 실질적 의미는 정부의 정책과 결정에 대해서 야당이 군말 없이 무조건 협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협치는 현단계 한국 사회에서 대표적인 보수적 프레임이다. 더민주당은 이 덫에 걸려서 사드 문제에 관해서 소위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것을 내걸게 되었다. 쉽게 말해서 사드 배치에 실질적으로 찬성하고 있는 것이다.

사드 문제에 관한 한 ‘전략적 모호성’은 박근혜 정부가 지난 2년간 취해 왔던 노선인데 얼마 전 박근혜 정부는 갑작스럽게 성주에 사드를 배치한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또 박근혜 정부는 왜 사드를 배치해야 하는지, 또 왜 그게 성주인지에 관한 일체의 토론을 봉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더민주당의 입장은 실질적으로 사드 배치 찬성을 뜻하는 것이다.

원래 전략적 모호성이라는 것은 결정을 위한 정보가 없거나 매우 부족할 때, 혹은 속으로는 이미 어떤 결정이 내려져 있지만 이를 대외적으로 명시해서 어느 한 쪽의 편을 듦으로 해서 나머지 다른 쪽으로부터의 반발에 의한 큰 손실이 예상될 때에 채택한다. 박근혜 정부의 경우는 후자였다. 그리고 전략적 모호성은 대외적인 영역에서 채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민주당은 사드 문제에 관해 ‘당론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게 당론’이며 전략적 모호성을 채택하는 이유는 ‘수권 정당으로 가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사드 문제와 같은 극히 중요한 이슈에 관해서 당의 입장을 명백히 정리해서 발표하지 않는 것은 정치적으로 무책임한 일이다. 또 이렇게 엉거주춤하게 눈치를 보는 것 역시 수권 정당으로서의 자격에 현저히 미달하는 것이다.

사드 배치와 관련해서 중국이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가 취한 전략적 모호성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그 경우는 일단 당장 미국 편을 노골적으로 들지 않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박근혜 정부가 일방적으로 사드 배치를 결정하고 민주적 토론을 봉쇄하고 있다. 여기서 야당이 취한 전략적 모호성은 결국 사드 배치를 찬성한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뜻한다. 즉, 내놓고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내가 초등학교 때 배운 민주주의 이론에 의하면, 원리적으로 야당은 ‘협치’의 당사자가 아니다. 다수당이든 소수당이든 간에 야당은 이미 국정 및 통치에 참여하고 있고 또 그 결과에 대해서 선거 등을 통해서 정치적 책임을 진다. 지난 총선 전까지는 야당에 대해서 ‘협치’란 말을 거의 안 쓰다가, 총선 이후에 야당들이 원내 다수를 이룬 다음에서야 야당들에 대해서 ‘협치’를 강요하고 있는 보수 언론의 저의를 간파해야 한다. ‘협치의 덫’에 걸린 더민주당은 수권정당의 자격이 전혀 없다. 이는 전략적으로 명백하다.

이재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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