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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은 선거 중] 거덜 난 나라 곳간... 권력 연장하려는 마두로의 승부수

입력
2018.03.29 19:0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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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마두로 퇴진” 요구 잇따르자

의회 해산하고 시위대 유혈 진압

12월 대선도 5월로 앞당겨

유력 야권 경쟁자 연금ㆍ수감

경제 붕괴ㆍ부패 혐의가 승패 관건

야당 팔콘 후보 지지도 심상찮아

투표 추적 신분증 배포... 배급 통제

외신 “마두로의 선거 무기는 식량”

재선 성공해도 쿠데타 가능성

22일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화폐 개혁 단행 계획을 발표하면서 새로운 100볼리바르 지폐 이미지를 들어보이고 있다. EPA 연합뉴스
22일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화폐 개혁 단행 계획을 발표하면서 새로운 100볼리바르 지폐 이미지를 들어보이고 있다. EPA 연합뉴스

‘21세기 사회주의 실험’을 내건 우고 차베스 집권기(1999년 2월~2013년 3월), 베네수엘라는 전 세계 좌파에게 희망을 준 나라였다. 세계 최대 원유 매장량과 고유가 행진으로 벌어 들인 오일 머니 대부분은 무상 복지와 문맹 퇴치 등에 쓰였다. 1998년 50.4%였던 빈곤율은 2011년 31.9%로 뚝 떨어졌고, 차베스는 빈민 계급의 영웅이 됐다. 그러나 2013년 3월 차베스의 사망, 한 달 후 그의 후계자인 니콜라스 마두로(56)의 대통령 당선과 함께 모든 게 바뀌었다. 차베스의 부재(不在) 탓은 아니다. 그 무렵 시작된 글로벌 저유가의 공습 때문이다. 유가 폭락으로 나라 곳간은 거덜이 났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으며, 서민들은 식량조차 구하기 힘들어졌다. 그 결과, 집권 통합사회당(PSUV)은 2015년 총선에서 전체 의석 수의 3분의1(167석 중 55석) 밖에 얻지 못하는 참패를 당했다. 지난해 11월에는 국가 신용등급이 ‘제한적 디폴트(채무불이행)’ 수준으로 강등돼 사실상 ‘국가 부도’ 상태가 됐다.

특히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2017년은 베네수엘라 현대사의 가장 암울한 한 페이지로 기록될 만하다. 4월부터 ‘마두로 퇴진’ 요구 시위가 잇따르자 마두로는 제헌의회 선거(7월30일) 카드를 꺼내 들어 기존의 여소야대 의회를 해산하고, 자신에게 우호적인 인사들로 채워진 무소불위 권한의 새 의회를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반(反)정부 시위가 더욱 격렬해졌지만, 마두로 정부는 유혈 진압에 나섰다. 내전을 방불케 하는 충돌 끝에 시민 125명이 목숨을 잃었다. 경제 파탄과 민심 이반, 정치적 불안정 및 폭압이 이어지며 베네수엘라의 황금기는 끝이 났다.

올해도 사정이 나아질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마두로 정권의 안정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는 뜻이다. 이에 마두로는 지난 1월 말 두 번째의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다. 올해 12월로 예정된 대선을 4월22일로 앞당기려 한 것이다. 빠른 시일 내에 재신임을 얻어 권력 기반을 강화하겠다는 포석이었다. 야권의 반대가 거셌지만, 일부 야당의 동의로 결국 5월 20일(현지시간) 조기 대선이 치러지게 됐다.

‘마두로 압승’ 예상과 달리 접전 양상

마두로의 압승은 기정사실처럼 보였다. 야권의 유력 경쟁자들은 가택연금 또는 수감 상태여서 출마 자체가 불가능했고, 지난해 12월 지방선거를 보이콧한 일부 야당에 대해 제헌의회가 정당 자격을 문제시하며 사실상 대선 출마를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요 우파 야당 3곳이 주도하는 국민연합회의(MUD)는 이런 점을 비판하며 대선 불참을 선언했다. 선거 자체의 정당성을 훼손하겠다는 의도인데, 이와 별개로 마두로로선 뚜렷한 적수가 없는 ‘누워서 떡 먹기’ 대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픽=박구원기자
그래픽=박구원기자

하지만 막상 선거전이 시작되자 상황은 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우선 차베스와 가까운 관계였다가 2010년 PSUV를 탈당한 군 장교 출신 엔리 팔콘(57) 전 라라주지사가 대권 도전을 선언했다. ‘선거 불인정’ 전략이 틀어진 MUD로부터 제명을 당한 팔콘은 진보전진당(PA) 후보로 선거운동에 나섰는데, 여론의 지지가 심상치 않다. 로이터통신은 “2월 초 1,000명을 상대로 실시된 여론 조사에서 팔콘의 지지율은 38.7%였고, 마두로는 26.1%에 불과했다”며 “군소 후보들을 뺀 양자 대결에서도 팔콘(45.8%)이 마두로(32.2%)를 앞질렀다”고 전했다. 이에 더해 마두로가 2013년 대선 때 브라질 대형 건설사 오데브레시에서 3,500만달러의 선거 자금을 기부받고, 그 대가로 40억달러짜리 공공건설 사업 계약 특혜를 줬다는 부패 스캔들도 최근 재점화하고 있다. 마두로의 혐의가 구체화할 경우 지지율은 더 떨어질 수도 있다. 조기 대선 카드가 마두로의 자충수로 판명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물론 베네수엘라의 여론 조사는 신뢰성이 낮고, 마두로의 부패 수사가 본격화할지도 불투명하다. 그럼에도 그의 승리를 낙관하기 어려운 진짜 위험 요인은 역시 국가 경제의 붕괴다. 국제통화기금은 지난해 2,400%였던 베네수엘라 물가상승률(인플레이션)이 올해 1만3,000%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영국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지난달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87%는 스스로를 빈곤층(61%는 극빈곤층)이라고 여겼다. 엑소더스는 당연한 결과였다. 2012년 이후 브라질과 콜롬비아 등 해외로 이주한 베네수엘라인 81만 5,000명 중 절대 다수는 최근 2년 새 떠난 사람들이다.

재선 성공해도 미래는 ‘암울’

극심한 경제난 타개를 위해 마두로 정부는 지난달 20일부터 원유 자원을 기반으로 하는 ‘페트로’라는 가상화폐를 만들어 판매에 들어갔다. 유동성 확보를 위해서였지만, 글로벌 금융 중심국인 미국은 페트로의 자국 내 거래와 사용을 전면 금지하는 등 경제제재를 가속화하고 있다. 이달 22일에는 휴지 조각이 된 볼리바르화(貨)의 ‘0’을 세 자리 제거하는 ‘화폐 개혁’ 방침도 발표했으나, 이 역시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지는 미지수다. 팔콘이 월스트리트 은행 분석가 출신을 영입, ‘비즈니스 친화적’ 정책들을 내놓으며 경제를 대선 쟁점으로 삼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5월20일 베네수엘라 대통령 조기 선거에 입후보한 야권 엔리 팔콘 후보가 수도 카라카스 유세에서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5월20일 베네수엘라 대통령 조기 선거에 입후보한 야권 엔리 팔콘 후보가 수도 카라카스 유세에서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그러나 속단은 이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2일자 베네수엘라 현지 르포 기사에서 마두로가 기아(hunger)를 선거 무기로 삼고 있다고 전했다. 생활고에 찌든 유권자들이 정부로부터 ‘확실하게’ 식량을 배급받고자 투표 때 마두로를 찍는 역설이 벌어질 것이라는 진단이었다. 한 주민은 WSJ에 “(마두로에게) 표를 던지지 않으면 음식을 받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고 했다. 특히 투표 여부 추적이 가능한 새로운 신분증, 이른바 ‘조국 카드(fatherland card)’를 배포하는 마두로 정부의 정책은 ‘식량의 선택적 공급’이라는 효과를 낳으며 매우 강력한 통제 시스템이 되고 있다고 WSJ는 지적했다. 지난해 제헌의회 선거(7월)와 지방선거(10월ㆍ12월)에서의 여권 압승은 과정이야 어떻든 마두로의 승리를 점치게 하는 강력한 방증이다.

하지만 마두로가 재선에 성공한다 해도 권좌가 오래 지속되진 못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미국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는 지난 24일 ▦베네수엘라의 석유 생산량이 계속 줄어든다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국제에너지기구(IEA)의 새로운 분석 ▦차베스 정부의 내무ㆍ법무장관을 지낸 미구엘 로드리게스 체포 등 집권 엘리트 내 분열 등을 그 징후로 제시했다. 워싱턴포스트도 “마두로는 쿠데타에 직면할 수 있다”는 렉스 틸러슨 전 미 국무장관의 언급을 전하며 “마두로의 가장 큰 위협은 내부, 특히 군대에 잠복해 있다”고 내다봤다. 시점이 문제일 뿐, 차베스가 시작한 사회주의 실험은 베네수엘라의 총체적 위기, 그리고 마두로의 ‘비자발적 퇴장’이라는 우울한 에필로그를 남기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김정우 기자 wookim@hankookilbo.com

그래픽=박구원기자
그래픽=박구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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