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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효도에는 절제(節制)가 필요해

입력
2016.02.24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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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이맘때면 생애 첫 민방위 훈련이 생각난다. 작업실 보일러가 터져버릴 정도로 추운 날씨였다. 혹독한 훈련에 대비해 새로 산 운동화를 신었다. 설레는 발걸음으로 동네에서 제일 큰 강당에 도착했다. 아침을 굶어 핼쑥해진 동료 대원들이 모여있었다. 그들 모두가 나처럼 조국과 사회에 이바지하려는 사명감을 품고 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함께 굶고 있으니 적어도 동지애는 저절로 솟아났다.

첫 시간에는 강당에서 틀어준 ‘꼬마 유령 캐스퍼’를 보았다. 유령이 나타났을 때 지역사회를 방어하는 법을 알려주는 영화였다. 이어지는 시간에는 단상에 올라선 연사 한 분의 강연을 들었다. 효도를 잘 하자는 강연이었다. 부모님께 싹싹하게 잘 대하고 어깨도 가끔 주물러 드리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고 했다. 훈련은 그게 거의 전부였다. 민방위대원만의 특별한 무공을 전수받기를 기대했지만 앉은 채로 끝났다. 새 운동화는 훈련을 마치고도 전혀 상하지 않았다. 나는 근처 슈퍼에 들러 호박엿을 사먹으면서, 어쨌든 자랑스러운 민방위대원이 되었다며 홀로 기뻐했다.

시간은 흘렀고 이제 나는 훈련장에 슬리퍼를 신고 가는 베테랑이 되었다. 그리고 자칭 우리동네 핵심 민방위대원으로서 경험과 연륜을 쌓으며 두 가지를 깨달았다. 첫째, 그 연사처럼 같은 얘기를 두 시간 동안 반복하는 일은 무진장 어렵다. 다른 강연자들은 5분이나 10분만에 끝내기도 한다. 둘째, 민방위에서 가르치는 것도 가끔은 틀린다. 이를테면 그 연사가 말한 효도는 진정한 효도가 아니다.

논어에 따르면 공자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부모님께 싹싹하게 잘 하는 것이 효도라면 개나 말을 잘 돌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말씀도 하셨다. “아랫사람이 힘들여 일하면서 먹고 마실 것은 윗사람에게 바치는 것 따위가 효도냐?” 공자님에 따르면 민방위에서 배운 효도는 진정한 효도가 아니다. 부모님께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거나 명절날 한우고기 세트를 사드리는 것도 효도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효도란 무엇인가? 논어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을 듣자면, “아비가 살아있을 적에는 그의 뜻을 살피고, 돌아가신 후엔 그의 행적을 살피는 것, 그래서 3년 간은 아비의 길을 고치지 않는 것이 효도다.” 아비의 뜻과 행적을 살펴서 어찌 하란 얘긴가? 그 길을 걸으라는 것이다. 더 깊이 생각한다면 아비의 삶대로 살라는 뜻인 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효도란, 부모가 사심 없이 근면하게 일했다면 나도 그렇게 살고, 부모가 어려운 이웃과 나누었다면 나도 그렇게 살며, 부모가 사회를 위해 헌신했다면 나도 그렇게 사는 것이다. 요컨대 부모의 삶을 통째로 이어가는 것이다. 유교는 내세(來世)를 상상하지 않지만 죽음이 곧 꽝이라고 하지도 않는다. 우리 부모들은 우리가 그들의 삶을 이어가기 때문에 계속해서 삶을 누린다. 우리도 우리를 똑같이 따라 하는 후손들을 통해 영원한 삶을 누릴 것이다. 그게 바로 효도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세계적인 효도강국이라 할 만하다. 대통령께서는 선친의 위업을 이어가고 계시고, 거물급 야당 의원은 탈당을 선택하기 전에 부친의 뜻을 먼저 물었다. 이처럼 효도 앞에서는 정치인들도 삼겹살과 쪽마늘처럼 한마음을 이루니 온 나라에 효녀, 효자가 풍년이다. 오직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내 친구 한 명만이 불효하다. 그의 아버지는 포카칩을 즐기시다 옥고를 치르셨지만 내 친구는 도박은커녕 게임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 친구를 보며 불효의 아름다움을 깨우쳤다. 효도가 지나치면 선대의 삶을 이어가다 못해 물려받는다. 회장님의 자식이 또 회장님이 되고 빈곤노동자의 자식은 계속 빈곤노동자가 되는 세상이라면 그것을 어찌 성현의 도(道)라 하겠는가? 공자께서 아비의 길을 고치지 않는 기간을 3년으로 제시하신 것에 주목하자. 선대의 삶을 잇는 효도는 3년만 하고 멈추어도 좋다.

손이상 문화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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