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박소영 기자

등록 : 2018.01.29 04:40
수정 : 2018.01.29 07:14

“하늘 가야 만나려나…” 이산가족 1세대의 눈물

[이산가족 1세대의 눈물] 평창올림픽 계기로 상봉 마지막 기대

등록 : 2018.01.29 04:40
수정 : 2018.01.29 07:14

#1

평생 ‘망향의 꿈’ 90세 임모 할아버지

북한에 두고온 가족에 피해 갈까

유전자 채취 거부해 상봉 명단 못 들어

“어머니께 백고무신 못 사드려 한”

#2

상봉 신청 21번 탈락 89세 최종대씨

“월남한 내가 북에선 조국의 배신자

남은 동생들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존 여부도 몰라 슬플 따름이지”

#3

북을 고향으로 기억하는 세대

빠르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족 상봉의 꿈’ 애타게 소망

이산가족 1세대 임모씨가 23일 서울 동대문구 한 사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하던 중 한국전쟁 당시 가족과 헤어진 상황을 설명하며 눈물짓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서울 동대문구에 사는 이산가족 1세대 임모(90) 할아버지는 틈만 나면 자녀와 손주들에게 평안남도 순천의 고향 주소를 번지수까지 외우도록 한다.

“나 죽고 나서 혹시라도 통일되거든 가 보라는 심정이야.” 북의 가족을 만나리라 믿었던 세월이 어느새 68년. 구순(九旬)을 넘어서며 더는 망향의 꿈을 붙들지 않겠다는 듯, 할아버지는 영영 밟지 못할 것 같은 고향땅 주소를 자꾸만 되뇐다. 그렇게 임 할아버지는 고향과의 영원한 이별을 준비하는 중이다.

분단 73년, 6ㆍ25 전쟁 발발 68년. 그 사이 남쪽의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중 55%가 사망하면서 성인으로 월남해 가족과 헤어진 이른바 ‘이산가족 1세대(20세 전후 북을 떠난 세대)’가 빠르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북한을 고향으로 뚜렷이 기억하는 이들 세대 대다수가 90대로 접어들면서 사실상 남북가족 상봉을 애타게 소망해온 전 국민적인 분위기도 사그라들 것으로 보인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한반도에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지만, 남북 가족 상봉 재개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한편으로는 상봉을 포기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내려놓지 못한다. 어쩌면 살아생전 더 이상 상봉의 기회를 잡을 수 없게 된 이산가족 1세대의 이야기를 들었다.

백고무신 사드리지 못한 어머니 생각에 눈물

지난 23일 서울 동대문구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임 할아버지는 처음 경계했던 자세와 달리 2시간가량 진행된 인터뷰 말미 끝내 눈물을 쏟았다. 그를 울린 건 어머니 이야기였다. “한국전쟁 때 교생실습 한 달을 못 채우고 징집됐지. 모두 검정 고무신 신던 시절이라 월급 타면 막내아들 학교 보낸다고 고생한 어머니 백고무신 하나 사 드리려고 했는데, 지금은 그 생각이 가장 많이 나.” 눈물을 닦으려 잠시 화장실로 자리를 뜨기도 했다. 그의 이야기는 가족을 향한 그리움과 생존에 대한 절박함 사이를 오갔다.

4남매의 막내였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시집간 큰누나, 큰형과 작은형이 농사를 짓고 살았다. “한강보다 넓은 대동강이 굽이굽이 흘러가던 고향 풍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형제 중 유일하게 도시로 나와 사범전문학교를 다녔다. 졸업 전에는 초등학교로 교생실습을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교사가 되겠다는 할아버지의 꿈은 이뤄지지 못했다.

1950년 9월, 인민군으로 끌려갔다. 북한군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밀린 후 무차별 징집이 이뤄진 시기였다. “졸업식 하러 오라 그래서 학교로 갔다가 그대로 군대로 갔다. 이후로 나는 가족들에게 행방 불명된 사람이 됐지.” 그는 5개월 만에 유엔군 포로가 돼 거제수용소에 수감됐다.

수용소에는 또 다른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피란민과 인민군 출신이 한데 섞인 수용소에서는 우익과 좌익으로 갈라져 서로를 감시했고 죽였다. “남한에 남을지, 북한으로 갈지를 선택하는 면회심사를 하기로 했는데 전날 밤 수감자들끼리 먼저 알아서 희망지를 적었어. 북한으로 가겠다고 쓴 사람들이 수없이 밟혀 죽었지.” 밤마다 ‘오늘 밤에는 누구를 죽이자’는 모의가 이뤄졌고 이를 피하기 위해 잠자리를 바꿔 간신히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있었다. “끔찍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한 수용소 생활에서 어머니가 가장 그리웠어.”

부산 거여수용소로 옮긴 할아버지는 1953년 6월,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 포로 석방 명령으로 자유의 몸이 됐다. 이후 피란민들이 모였던 국제시장 인근 부전동에서 석 달을 지냈다. 이곳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족의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국제시장에서 작은형의 친구를 우연히 만났어. 이 사람이 작은형과 남한으로 오려 했는데 무슨 영문인지 형이 못 나왔다네.”

결국 할아버지는 남한에서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접은 채 서울행을 택했다. 고비마다 고향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받으며 서울의 한 속옷 공장에 취직해 5년을 일했다. 대학에 가고 싶어 공부해 입시에 붙었지만 일과 병행하기 힘들어 2년 만에 중퇴했다. 서울에서 가정을 꾸려 살아가면서 할아버지는 종종 북한의 가족 생각에 울었다고 했다. 부도를 겪으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여 적극적으로 북의 가족을 찾을 여유가 없었지만 명절이면 가족 몰래 화장실로 들어가 어머니 생각을 하며 눈물을 떨궜다고 말했다.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되며 할아버지 주변에서도 가족을 만난 사람들이 있었지만 더 큰 허탈감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상봉장에서는 감시관들이 지켜보고 있어 가족들끼리 속 시원하게 이야기하지 못해 답답하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며 가족 상봉을 다녀온 친구들의 80%정도가 우울증에 시달렸다더라.” 할아버지는 2000년대 초ㆍ중반 금강산 관광 열풍도 행여 피해를 입을 북한 가족을 생각해 외면했다. “그때는 정해진 길로만 가야 하고 엄격히 통제한다 해서 가지 않았는데, 지금은 ‘금강산에서 고향으로 물 흐르는 거라도 봤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아쉽다.”

임 할아버지는 20여년 전 이산가족 상봉 1차 대상자로 뽑혔지만 ‘북한에 내 정보가 넘어간다’며 가족을 찾기 위한 유전자 채취 등을 거부했고, 결국 최종 상봉 명단에서는 제외됐다. “난 북에서 죽은 사람으로 돼 있는데 여기서 떳떳하게 살고 있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어. 북에 남아있는 가족이 느닷없이 피해를 보지 않겠어요. 이산가족 1세대 99%는 다 그런 걱정을 하고 살아요.”

그림 2 이산가족 1세대인 최종대 이북도민회중앙연합회장이 22일 서울 종로 이북5도청 사무실에서 "개성공단 중단은 앞으로 자유로운 남북교류를 기대했던 1세대에게 큰 한으로 남았다"고 말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21번이나 상봉 신청 떨어져…올림픽이 마지막 희망

“휴전 회담 장소 근처에 집안 선영이 있어. 인근에 올라가면 다 보여. 지금은 온통 지뢰밭이고, 산소의 잡초가 나무가 돼 버렸어.”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이북5도청에서 만난 최종대(89) 할아버지에게 고향 개성은 ‘가깝지만 먼 곳’이다. 개성을 세 차례나 다녀왔으나 가족 소식은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다. 실향민들이 중국을 통해 휴대폰으로 북한의 가족과 연락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지만 정작 개성은 중국에서 너무 멀어 이마저도 불가능했다. “눈으로 보이는 지척에 고향이 있어 더 안타까워.” 최 할아버지는 처음부터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했지만 21차례의 정부 주선 상봉에서 번번이 떨어져 아픔을 삼켜야 했다.

이산가족들이 대부분 그렇듯 북에 있는 가족 걱정은 할아버지의 삶을 지배해왔다. 한국전쟁 전 남한의 영토였던 개성은 휴전 후 북한으로 편입됐고 국군이었던 할아버지는 ‘월남자’가 됐다. 개전 당시 할아버지(21)는 부모님과 여동생(19), 두 명의 남동생(14ㆍ10세)을 둔 장남이었다. 그래서 고향을 떠올릴 때마다 ‘조국의 배반자’가 돼 버린 자신으로 인해 동생들이 받았을 고통이 가장 걱정된다고 말했다. “10살 막내가 이제 여든이 됐을 텐데 전란의 고아에다 월남한 가족이 있으니 조국을 배신했다고 얼마나 고초를 당했을지.”

최 할아버지는 70년이 다 되어가지만, 전쟁 발발 몇 달 전 입대해 가족의 손을 놓게 된 상황을 하루도 잊지 못했다. “한국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서울이 함락되면서 개성은 피난할 새도 없이 참화를 입었어요. 개성의 공무원이었던 삼촌은 인민군에 의해 희생되셨고, 부모님은 동생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오르다 폭격으로 돌아가셔 동생들만 남았지. 천애 고아가 돼 버린 동생들 때문에 숙모가 1ㆍ4 후퇴 이후 다시 개성으로 돌아갔다가 영영 소식이 끊어진 겁니다.”

휴전 후 할아버지는 국가보훈처의 전신인 군사원호처에서 일하는 등 40여년을 공직에 몸을 담았다. 은퇴 후에도 이북도민회중앙연합회장을 지내는 등 실향민의 입장을 대변하는 일을 하고 있다. 2008년 경기도의 대북협력사업인 개풍 양묘장 준공식을 시작으로 개성도 오갔고, 집터까지 방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생들의 자취는 볼 수 없었다.

“얼마 전에도 개성공단 초입에, 경의선 철도 옆 동생들이 다니던 봉동초등학교가 그대로 있는 게 보였어. 당시 폭격을 안 맞은 모양이야.” 장단군의 선영도 남한에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무덤가에 무성한 잡초를 뽑을 수 없는 상황에 할아버지는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이산가족 1세대에게는 고향을 잃은 한,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혈육을 보고 싶다는 열망, 더 나아가 조상 무덤가에 성묘하고 죽었으면 여한이 없겠다 하는 심정이 절절해. 나야 선영의 지형지물을 다 꿰고 있지만 후세에 남겨줄 사진 한 장 없어 슬플 따름이지.”

할아버지에게 2016년 개성공단 가동 중단은 큰 상처가 됐다. 개성공단 근로자 5만명의 상당수가 개성 시민으로 고향 경제에 큰 도움이 됐다는 점이 늘 위로가 됐지만, 가동이 중단된 후 남측이 부담하던 전기와 수도마저 끊기면서다. “개성공단 중단을 전후해서 남북 교류가 완전히 끊겼고 서서히 자유로운 왕래로 나아갈 줄 알았던 이산가족 1세대에게는 큰 한으로 남았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북한과 통일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것도 1세대의 고민이다. “1세대 고령화가 지속되면서 이북5도청에서도 청년회 등을 통해 젊은 지도자를 육성해야겠다 생각하지만 60대조차도 취직, 결혼, 주거 등 현실의 문제 때문에 여유가 없어 규합이 되지 않고 있어요.”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7월 독일 베를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에서 실향민 문제 해결 의지를 드러낸 ‘베를린 구상’을 발표하고 평창 올림픽에 북한이 참여하면서 이산가족 1세대들은 다시 한번 희망을 품게 됐다고 한다. “평창 올림픽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후 이산가족 문제 협의가 시작되는 것에 기대하고 있어요. 1세대 남은 사람들 여생의 여망 아닙니까.” 박소영 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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