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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항복조서’는 없었다

입력
2017.02.1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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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지난 번 칼럼은 “히로히토의 항복 조서를 보면,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이 자신의 과거사에 대해 전향적이 될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인다”라는 말로 끝났다. 마땅히 히로히토(裕仁ㆍ1901~1989년ㆍ제124대 일본 국왕)의 ‘항복 조서’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이 멀지 않았던 1945년 5월, 미국 정부는 일본의 천황제 존폐를 놓고 고민했다. 미국의 여론은 히로히토의 처형을 요구했고 국무성의 다수파 역시 천황제 폐지를 주장했다. 하지만 국무성 안의 지일파(知日派)는 천황제를 존속해 주기로 약속해 준다면 일본으로부터 더 빠른 항복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반대 논리를 펼쳤다. 전쟁이 길어지면 아군의 전사자도 는다. 그러던 7월16일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한 미국은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두 도시에서 각각 20만과 12만 명이 즉사했다. 그 끝에 나온 천황(일왕)의 항복 조서는 일본어로 800자 분량, 한국어로 번역했을 때 200자 원고지로 약 6매 가량이다.

일본인으로서는 항복 조서가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수치스러울 것이다. 그러니 역사 시간에 한 문장씩 따져가며 저 문서를 학습했을 리 없다. 하지만 그것은 평범한 일본인들의 경우고, 일본 우익 엘리트들에게 저 항복 조서는 자신들의 비뚤어진 역사 인식을 굳건히 향도해주는 헌장이다. 그 좋은 예가 지난해 12월27일,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하와이에 있는 진주만 희생자 기념관을 찾았던 아베 신조의 태도에 드러난다. 전몰 희생자 기념관을 방문한 아베는 아무 선전포고 없이 기습을 벌였던 옛 전범국의 국가 원수라면 당연히 표했어야 할 반성이나 사죄를 일절 나타내지 않았다. 바로 히로히토의 항복 조서가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아시아해방전쟁’이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항복 조서 두 번째 문단에서 히로히토는 나라의 강녕을 도모하고 세계가 평화롭게 살기 위해 애썼다고 말한 다음 이렇게 말한다. “일찍이 미ㆍ영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까닭도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본디 짐의 뜻이 아니었다.” 일본의 문학평론가이자 사회운동가인 고모리 요이치는 ‘1945년 8월 15일, 천황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하였다’(뿌리와 이파리, 2004)에서 세 가지로 저 대목을 공박한다. 첫째, 미국과 영국에 대해 벌인 태평양 전쟁을 자존ㆍ자위의 전쟁이라고 의미부여를 함으로써 침략전쟁이었다는 사실을 감춘다. 둘째, 일본이 전쟁을 하게 된 것은 영ㆍ미의 아시아 식민지배에 맞서 아시아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호도한다. 그럼으로써 일제의 아시아 침략과 식민지배는 마치 없었던 것인 양 된다. 셋째,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이야말로 미ㆍ영과 태평양전쟁을 벌이게 된 요인인데도 중국과의 전쟁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원자폭탄을 개발한 미국은 1945년 5월의 상황과 달리, 미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천황제 존폐를 두고 더 이상 일본과 ‘밀당’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승리한 미국은 천황제를 존치했다. 중국의 공산화와 한국전쟁으로 인해 일본을 태평양의 방파제(반공 기지)로 만들어야 할 미국의 궤도 수정이 천황제를 용인하게 된 것이다. 궁합이 맞으려고 그랬는지, 히로히토는 항복 조서 마지막에 국체(천황제) 전복을 꾀할지도 모르는 ‘공산혁명’을 재차 강력하게 금지해 두었다.

항복 조서 따위는 원래부터 없었다. 8월14일 밤에 녹음되어 이튿날 정오에 라디오를 통해 발표되었기에 일본에서는 ‘옥음(玉音) 방송’이라는 명칭으로 더 알려져 있는 저 문서의 정식 명칭은 ‘대동아전쟁 종결에 관한 조서’이며, 보통 ‘종전 조서’라고 줄여 부른다. 일본인들은 천황이 ‘항복’ 한 것이 아니라, 일본 국민의 고통을 헤아리고 인류 문명을 파멸에서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종전’이라는 성단(聖斷, 임금의 판단을 높여 이르는 말)을 내렸다고 말한다. 전범이 전쟁을 중지시킨 평화의 구세주로 둔갑한 것이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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