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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진의 삶이 있는 풍경] 가을에 그리운 이들

입력
2015.11.03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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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한 후배 사진가가 삶을 마치고 먼 길을 떠났다. 남자들 못지않은 의리파에 아주 씩씩했던, 열악한 노동현장에 대한 취재 열정이 남달랐던 맹렬 여성이었는데 몸에 스민 병마를 결국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한동안 소식을 접하지는 못했어도 예전에는 종종 술잔을 기울이며 의지하던 사람이었기에 장례식장의 영정을 통해서야 오랜만의 해후를 하려니 안타까운 마음이 결코 가볍지가 않았다. 평소 고인과 친분을 나누었을 여러 조문객들도 침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예전에 같이 현장을 누볐던 몇몇 사진가들과 소주잔을 나누면서 떠난 이의 발자취를 애써 뒤적이는 자리가 길게 이어졌다.

멈춘 인연에 대한 아쉬움이 짙어진 탓일까. 오래 전 애석하게 스스로 생을 접은 또 다른 후배 사진가가 불쑥 머리를 스쳤다. 자그마한 체구의 그녀 역시 사진기자들이 넘치는 거친 현장 속에서 언제나 씩씩한 모습이었고, 마찬가지로 늘 노동자들의 고달픈 현실에 대한 고민 또한 매우 깊었던 친구였다. 꽤 오래 전에 이 친구를 기억하는 추모의 자리를 만들겠다며 유가족에게 큰소리를 쳤던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룬 채 내 일에만 빠져 지내는 터라 그 미안함에 고개를 들 수조차 없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가뭇해진 기억들을 건드리며 생전에 서로 친한 사이이기도 했던 두 사람에 대한 추억의 편린들을 떠올리고 풀어냈다. 그 때 먹먹해진 시간의 틈을 뚫고 누구보다 고인의 삶과 방향성에 공감하는 동지였던 남편이 잠시 합석을 했다. 그는 혹시 고인이 남긴 유품들의 사진을 찍어줄 수 있겠느냐며 정중하게 부탁을 해왔다. 그리고 병중이었던 아내가 자신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을 소각해버리지 않고 희망하는 이들에게 남기기를 원했다는 얘기, 노동자들의 살 권리를 위해 평생 애썼던 아내의 유지를 받들고 싶다는 얘기들이 슬픔을 가린 채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데워주었다.

며칠의 시간이 흐른 뒤 남편이 고이 정리해 온 그녀의 유품들을 맞이했다. 동료들과 함께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셔터를 누르다 보니 이제 대면이 불가한 옛 동료와 어느 순간 다시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것도 그 두 사람과 같이 말이다. 한 사람은 목소리가 걸쭉했고 다른 한 사람은 통통 튀었는데, “선배! 어떻게 하면 사진이 더 좋아질까요?”, “말만 하지 말고 술도 한잔 사 봐요. 쫌!” 하던 그 정겹던 목소리들까지도 다시 들리는 듯 했다. 아직 이른 나이에 생의 끈을 놓아버린 게 너무 안타깝지만 결코 모자라거나 헛되지 않은 삶을 살다 간 두 사람이다.

이름값을 널리 세우지도 못한 채 앞서거니 뒤서거니 일찍 저문 그들의 이름은 ‘이화정’, ‘이정원’이다. 두 사람은 퇴행의 역사가 반복되는 이 땅의 현실에 누구 못지않은 발언과 행동으로 맞섰고 세상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균등하게 존중되는 삶이기를 소망해 왔다. 엄혹한 세상에 맞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소리 없이 애 쓰는 이들 중 하나였을 두 사람을 이제는 늘 잊지 않게 기억하고 싶다.

가을예찬을 늘어놓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에 시린 냉기가 얹혀있다. 산간 지역에는 진즉 첫서리가 내렸고 자태 고운 붉은 단풍의 위세도 한풀 꺾여 버렸다. 머묾도 없이 그새 떠날 채비를 끝낸 이 가을에 벌써부터 누군가가 그리워지고 있다.

임종진 달팽이사진골방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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