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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진의 삶이 있는 풍경] 늙은 ‘간수’들의 연극무대

입력
2017.05.23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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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한 음성이 낮게 허공에 깔렸다. “반갑습니다. 여기는 오월 시민들이 계엄군들에게 붙잡혀서 끌려온 곳입니다”. 검정 군화에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이들 중 대표로 보이는 이의 환영인사였다. 그 앞에 선 20여명의 남녀 중학생들은 이런 분위기가 재미있다는 듯 혼탁하게 뒤섞여 수군거리기만 했다. 육십을 훌쩍 넘긴, 머리 희끗한 군복차림의 어른들은 오히려 이런 상황이 익숙해 보였다. 집중해 달라는 듯 종종 진압용 몽둥이를 허공에 휘젓기도 했다. 그 몸짓이 다소 어색해 보이기는 했다. 이곳을 찾아준 이들에 대한 고마움과 더불어 어떤 절실함 같은 감정이 두루 섞인 몸짓이었다.

그러나 인사를 마친 그들은 진짜 광포한 계엄군 못지않은 눈빛으로 진지하게 상황을 이끌어 갔다. 목소리는 더욱 거칠게 바뀌었다. “여러분들은 이곳에서 80년 그날처럼 영창에 갇혀도 보고 무릎도 꿇어보고 옛날 그대로 똑같이 체험하게 될 겁니다. 자! 모두 쪼그려 앉았다 서기 20회! 실시!”

아까 전부터 낄낄거리고 있던 학생들이 갑작스런 반말투 호령에 허둥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엄중하게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늙은’ 간수들의 거칠 것 없는 행동에 놀라 이내 몸의 자세를 바꾸었다. 예년과는 달리 ‘님을 위한 행진곡’이 제창되고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의 진정성 있는 참여로 기억될 5·18 민주화 항쟁 37주년 기념식의 여운 때문일까. 영창체험 현장의 분위기는 점점 묵직하게 달아올랐다.

지난 5월 19일. 광주광역시 서구 상무평화로에 위치한 5·18 자유공원. 이곳은 지난 80년 당시 항쟁에 참여했다가 붙잡힌 시민군들이 갖은 고문과 구타, 구금 등의 반인권적 상태에 처해졌던 터를 복원, 재현해 놓은 장소로 흔히 상무대로 불리는 곳이다. 매년 이맘때면 이곳을 찾아 법정, 영창체험에 참여하는 많은 학생 및 시민들을 위해 고문피해의 당사자인 5·18 유공자들이 직접 간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4년 째 매주 광주트라우마센터를 오가며 사진치유프로그램을 통해 만나는 고문피해자들 중 세 분이 올해 이 영창체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한번 살펴보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찾아간 길이었다.

고문 받는 상황에 귀를 기울이고 직접 영창에 들어가 철창 앞에 선 학생들은 모두 탄식과 한숨을 아끼지 않으며 엄혹했던 그날을 느끼려 애를 썼다. 특히 밀랍인형으로 당시의 탈법적 재판상황을 재현해 놓은 법정체험관을 들른 학생들은 진행자의 마지막 얘기에 숨을 죽이며 몰입했다. “바로 우리들입니다. 계엄군들에게 끌려와 이곳에서 죽도록 맞아가며 갇혀있던 바로 우리들이었습니다.” 찡하는 울림은 학생들의 가슴을 훔치고는 이내 내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지켜보는 내내 감흥이 여러 갈래로 흩어졌다. 실화를 다룬 연극무대의 노배우들이 농익은 연기를 펼치듯 그들은 역사의 진실을 알리는 일에 자신의 열정을 뜨겁게 쏟아냈다. 80년 오월 당시 시민군으로 참여했다가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으며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있던 바로 그들이 다시 자신의 몸을 들여 시대의 아픔을 증언하는 감동의 현장이었다. 어느새 늙은 ‘간수’들의 눈빛에 맑은 미소가 퍼져있었다. 유난히 따사로운 오월 광주의 하늘이 이들을 지켜주었다.

임종진 달팽이사진골방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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