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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국정원, 과오를 되풀이 않는 길

입력
2016.03.1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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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서울 내곡동 국가정보원에서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 국가정보원 국정감사에서 국정원 간부들이 정보위 의원들을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10월 서울 내곡동 국가정보원에서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 국가정보원 국정감사에서 국정원 간부들이 정보위 의원들을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살아 돌아온 게 꿈만 같다. 지금까지는 반공, 반공 해도 그 의미를 몰랐으나 우리가 왜 반공을 해야 하는지 절실히 깨닫게 됐다.”

1987년 1월 싱가포르에서 북한으로 납치되기 직전 극적으로 탈출했다는 기업체 홍콩 주재원 윤태식씨가 김포공항 도착 직후 기자회견에서 했던 발언이다. 그는 납치, 탈출 경위, 북한 공작원 협박 내용 등을 털어놓으며 계속 가슴을 쓸어 내렸다고 당시 언론들은 전했다. 우리 정보기관은 비밀공작으로 북한 마수에서 자국민을 지켜낸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부인이 북한 간첩’이라던 윤씨 주장은 2000년대 초 뒤집힌다. ‘수지 김 살인사건’, ‘패스21 윤태식 게이트’다. 부부싸움 끝에 부인을 살해하고 간첩으로 죄를 뒤집어씌운 그의 잘못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더 충격을 줬던 것은 정보기관의 행태였다. 나중에 드러난 바로는 국가정보원 전신, 국가안전기획부가 윤씨의 부인 살해 사실을 87년부터 확인하고도 은폐했다. 살인자를 반공투사로 부각시켜서라도 체제 대결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잘못 때문에 2003년 8월 국정원은 사건 조작을 공식 사과해야 했다. 유족 위자료 42억원도 대부분 국민 세금이었다.

너무 먼 옛날 이야기 같은 가. 그럼 2013년 1월 세상에 알려진 유우성씨의 ‘서울시 공무원 탈북자 간첩 사건’은 어떤 가. 탈북자 지원 업무를 하던 유씨가 간첩이었다는 국정원 대공수사 결과는 나중에 국정원 직원들의 허위 공문서 조작 사실이 드러나면서 모두 무너졌다. 2014년 4월 남재준 국정원장이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또 고개를 숙였다. 말뿐인 반성만 되풀이하는 통에 정보기관 망신사는 이어져온 것이다.

국정원이 갈구했던 테러방지법이 통과된 지 겨우 2주 지났다. 이세돌 9단 활약과 4ㆍ13 총선에 묻혀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 기억은 아스라해지고 있지만, 조작과 은폐라는 국정원 오욕의 역사는 여전히 회자되고 있다.

서둘러 법을 통과시킨 국정원은 다짐했다. “앞으로 오직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소명 완수에 최선을 다해 입법 과정에서 나온 우려가 기우에 불과했음을 국민들께 보여드리겠다.” 철저한 테러 대비는 국가적 과제인 만큼 그들의 설명을 믿고 싶다. 하지만 수 조원의 예산을 쓰며, 수만 명의 뛰어난 인력을 가진 국정원이 그 동안 국민을 걱정시켰던 과오를 과연 되풀이하지 않을지는 미지수다.

법 통과를 전후해 인천국제공항, 인천항 보안망이 뚫렸을 때 보였던 국정원의 책임 회피 행태도 실망스러웠다. 테러 관련 권한은 행사하겠지만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의도가 여실했기 때문이다. 사이버테러방지법을 추가 통과시키겠다며 설익고 불확실한 북한의 해킹 위협 사례를 흘리고, 국회 긴급보고를 잡아 여론몰이만 해대는 수순도 수십 년째 그대로인 구태다.

야당 국회의원부터 시작해 기자, 시민단체 관계자를 가리지 않는 국가기관의 무차별 개인ㆍ통화정보 수집도 법 통과 전이나 후나 다르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다. 국정원은 입장 보도자료에서 “일반 국민들은 사생활 침해를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래도 ‘나는 일반 국민인가, 일반적이지 못한 국민인가’라는 자기검열 심리는 확산일로다. 국정원은 자유의 위축 등 소기의 성과를 거뒀는지 모르겠으나 그들에 대한 불신도 커지는 게 더 문제다.

‘열 명의 죄인을 처벌 못하더라도 한 명의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어선 안 된다.’ 18세기 영국 법학자 윌리엄 블랙스톤의 경구다. 국정원 입장에선 한 명의 테러 용의자도 놓치지 않아야 하는데 무슨 말이냐 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우선인 건 국민 인권이고, 헌법 상 인신보호, 무고한 피해자 발생 금지 원칙이다. 부끄러운 과거사를 씻고 국민 안전의 보루로 자리하기 위해 국정원이 법 정의의 기본원칙부터 되새겼으면 한다. 첫째도 신뢰, 둘째도 신뢰 회복이다. 과연 가능할 까.

정상원 사회부기자 orno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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