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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시스, 배철현의 비극읽기] 명성에 눈 먼 아가멤논, 딸을 희생양으로...

입력
2017.07.2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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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피게니아의 희생. 프랑수아 페리에가 1633년에 선보인 작품.
이피게니아의 희생. 프랑수아 페리에가 1633년에 선보인 작품.

인생은 매 순간 갈림길이다. 두 가지 길에서 인간은 한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그 길이 최선이라고 믿는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는 인간이 봉착할 수밖에 없는 갈림길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아르고스는 고대 그리스의 가장 오래된 도시로 과거 미케네 문명의 위용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아르고스의 왕, 아가멤논은 아르고스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명의 불씨를 살리고 있었다. 인류문명의 발상지는 오리엔트지만, 그 문명이 꽃피울 장소는 그리스라고 확신하였다.

오리엔트는 고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오늘날 이라크), 히타이트(오늘날 터키), 그리고 후에 등장하는 페르시아(오늘날 이란)와 인도를 총칭하는, 서양인들의 용어다. 아가멤논은 지중해를 장악하여 그 해상무역을 독점해야 문명의 중심이 될 수 있다고 상상했다. 이 거대한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소아시아의 해상강국 트로이를 함락시켜야 한다.

아가멤논, 지중해 제패를 꿈꾸다

그리스연합군이 트로이를 공격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트로이의 왕자인 파리스가 아가멤논의 동생이자 스파르타의 왕인 메넬라오스의 부인 헬렌을 납치해서다. 파리스는 헬렌을 납치하여, 고대 그리스의 최고신인 제우스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주인과 손님간의 계약과 약속인 ‘정의’를 깨드렸다. 파리스가 손님 자격으로 주인 메넬라오스를 방문하여, 메넬라오스의 부인 헬렌을 앗아간 행위는 불의(不義)다. 이 사건이 트로이전쟁으로 이어지는 불행의 씨앗이었다. ‘헬렌’의 그리스어 의미는 ‘파괴하다’라는 ‘헬레(hele)’와 ‘배’를 의미하는 ‘나(na)’의 합성어로 ‘난파된 배’란 의미다. 헬렌은 자신의 치명적인 아름다움에 성급히 다가오는 인간의 삶을 ‘바다 한 가운데서 떠있는 난파된 배’로 만들어 버리는 죽음과 폭력의 상징이다.

아가멤논에게는 처제 헬렌을 되찾아 메넬라오스의 행복을 회복시켜주려는 착한 의도도 있었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트로이를 함락하여 지중해의 맹주가 된다는 ‘명성’을 얻고 싶었다. 아가멤논에게 ‘명성’은 삶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다. ‘명성’은 다른 사람들이 어떤 개인에게 부여하는 가치다. 고대 그리스어로 ‘명성’은 ‘클레오스(kleos)’인데, 단어의 어근 의미가 ‘듣다’이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영웅들은 자신의 용맹으로 전쟁에서 승리하여, 명성을 획득한다. 아가멤논은 자신과 자신이 다스리는 도시, 아르고스의 명성을 위해 험한 바다로 출정한다.

아가멤논을 붙잡은 칼카스의 예언

신은 인간에게 명성을 쉽게 주지 않는다. 인간은 전쟁에서 자신의 목숨을 바칠 정도의 충성심을 보여야 명성을 가질 수 있다. 아가멤논이 다른 그리스 왕들, 그리스 영웅 아킬레우스, 그의 특수 부대, 그리고 수많은 그리스 군인들과 함께 배를 타고 출정할 참이다. 그러나 거센 바람이 불어 한 척의 배로 항구를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예언자 칼카스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 칼카스는 새가 비행하는 모습을 보고 신들의 의도를 읽어내는 능력이 있는 예언자다. 칼카스는 눈을 들어 하늘에 나는 새들의 움직임을 보고 그 이유를 찾아낸다. 아가멤논이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가 아끼는 거룩한 사슴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칼카스는 아르테미스의 화를 진정시키기 위해, 아가멤논도 그에 상응하는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가멤논의 희생이 없다면 트로이 원정은 시작도 하지 못하고 실패할 것이다.

딸 이피게니아를 희생양 삼다

아가멤논은 깊은 시름에 빠진다. 아르테미스에게 사슴은 자식과도 같다. 아르테미스는 아가멤논의 무엇을 자신의 사슴과 동일한 가치로 평가할 것인가. 그것은 아가멤논이 부인 클리템네스트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 이피게니아다. 이피게니아의 희생은 아버지 아가멤논 자신의 헌신이기도 하다. 아가멤논은 이피게니아의 희생을 통해, 아르고스와 그리스에 명성을 가져올 것이다. 이피게니아의 희생은 아가멤논 자기 자신의 희생이다.

아가멤논은 이피게니아를 거짓말로 유인한다. 그리스 군대가 트로이로 떠나기 전 그녀를 아킬레우스와 결혼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이피게니아와 클리템네스트라는 그리스 최고의 영웅 아킬레우스를 오래 전부터 흠모하고 있어 기쁘게 아울리스라는 항구로 간다.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이 자신을 이용하여 이피게니아를 죽이려는 속셈을 알고 희생제사를 막으려 한다. 그러나 이피게니아는 자기 스스로를 대의를 위한 제물로 바치겠다고 결정하고 죽는다.

폭력과 피로 얼룩진 아트레우스 가문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아가멤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트레우스 가문’의 오래된 폭력을 이해해야 한다. 그 가문에서 살인은 유전이며, 폭력은 전염병이었다. 이런 성격을 찾기 위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머나먼 조상으로까지 이르러야 한다. 아이스킬로스는 아가멤논이 속한 아트레우스 가문의 끔찍한 이야기에 주목하였다.

먼 조상 탄탈루스는 신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아들인 펠롭스를 요리하여 신들에게 대접하였다. 신들이 이 사실을 알고 펠롭스를 다시 살렸다. 데메테르 신이 먹은 펠롭스의 어깨를 대장장이 신인 헤파이스토스가 상아로 만들어 끼워 넣었다.

탄탈로스는 지옥 하데스에 감금되어 영원한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렸다. 영어에 ‘감질나다’라는 단어인 ‘탠탈라이즈(tantalize)’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11권에 등장하는 것처럼, 먹음직스런 과실을 탄탈로스가 따려면 그 과실들이 움직여 영원히 따먹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에 만들어진 단어다.

한편 펠롭스는 히포다메이아에게 한눈에 반해, 그녀의 아버지 오이노마오스 왕에게 전차경주를 제안한다. 오이노마오스 왕은 자신의 딸 히포다메이아에게 구혼하는 청년들과 전차경주를 하여 지는 자를 모두 참수하였다. 오이노마오스 왕의 전차 바퀴를 밀랍으로 바꿔 치기 해, 전차가 전복되고 오이노마오스 왕이 고삐에 목이 감기는 순간 펠롭스는 그를 죽인다.

아트레우스와 티에스테스는 펠롭스와 히포다메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이다. 아트레우스는 아가멤논의 아버지이고, 티에스테스는 아이기스토스의 아버지다. 아트레우스는 자신의 아내를 빼앗은 동생 티에스테스에게 복수하기 위해, 티에스테스의 아들이자, 아이기스토스의 형을 죽인 후, 요리하여 티에스테스에게 대접한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아가멤논’에서 아이기스토스는 아게멤논의 아내, 클리템네스트라의 애인이다.

저주와 복수의 폭력성, 축제로 승화한 그리스

아가멤논이 트로이전쟁으로 출정한지 10년째 되던 해 고향 아르고스로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에 메넬라오스는 폭풍을 맞이하여 실종되었다. 아가멤논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편하게 살 참이다. 그는 트로이에서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딸이자 트로이 영웅 헥토르의 동생인 카산드라를 첩으로 데려온다. 아르고스에서는 복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딸을 죽인 매정한 아버지를 죽이려는 클리템네스트라, 자기 형의 죽음을 되갚아주려는 ‘클리템네스트라의 정부’ 아이기스토스는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는 아트레우스 가문의 저주와 같은 신화를 디오니소스 축제를 통해 의례로 변모시켰다. 디오니소스 극장에 모인 아테네인들은 마치 부활절에 모인 그리스도교 신도들처럼, 폭력과 죽음이 평화와 생명의 새로운 에너지를 선사할 것이라고 믿었다. 영국 시인 윌리엄 B. 예이츠는 ‘비극의 두 노래(Two Songs from a Play)’라는 시를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나는 몰두하고 있는 한 처녀가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곳은 거룩한 디오니소스 신이 죽어, 자신의 옆구리에서 심장이 찢겨나가고 그녀의 손 위에 심장을 올려 심장의 울림을 견디는 그런 장소입니다. 그리고 모든 뮤즈들이 봄에 ‘마구누스 안누스’를 찬양하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신의 죽음이 단순히 비극 작품인 것처럼.”

아테네인들은 신화를 의례로 체험하였다. 아이스킬로스는 이 통과의례를 비극이라는 위대한 예술작품으로 변화시켜, 순간을 사는 인간에서 개인적이기도 하고 우주적인 삶의 의미를 가장 폭력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 서서히 완성된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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