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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황무지

입력
2016.09.2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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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 꽃을 피우며/ 추억에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흔들어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영국의 시인 T.S. 엘리엇이 1922년에 쓴 시 ‘황무지’의 구절이다. 시대적 배경은 1차 세계대전 뒤다. 전쟁으로 무너진 유럽 문명과 인간의 정신적 황폐함을 생명이 움트는 봄에 빗대 고발한 시다. 참혹했던 겨울을 딛고 꽃을 피우기 위해 어김없이 찾아오는 4월의 봄비가 잠든 뿌리처럼 무기력해진 인간의 눈에는 더없이 잔인하게 보였을 것이다.

▦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임기 마지막 유엔총회 연설에서 북한을 황무지라고 불렀다. “성공한 한국과 황무지 북한의 극명한 대조는 중앙 계획통제 경제의 막다른 길을 잘 보여준다.” 글로벌 경제를 강조하기 위해 북한의 고립경제를 비판한 것이지만, 북한이 이렇게 된 것은 핵 집착 때문이라는 인식이 드러난다. 앞서 조시 어니스트 백악관 대변인도 북한이 노동당대회에서 핵 보유국을 선언하자 “북한이 황무지에서 나올 길이 있다”고 한 적이 있다. 엘리엇이 노래한 것처럼 북한에도 봄비가 내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까.

▦ 미국이 특정 단어를 동원해 북한체제를 비난한 것은 역대 정부의 단골 메뉴였다. 2002년 국정연설에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악의 축(Axis of Evil)’이라고 한 게 대표적이다. 처음에는‘증오의 축’이었다가 종교적 색채를 가미하면서 진화한 이 말은 옥스퍼드 사전에도 등재됐다. 2005년에는 콘돌리사 라이스 국무장관 지명자가 상원 인준청문회에서 북한 등 6개국을 ‘폭정의 전초기지(Outposts of Tyranny)’라고 해 파문을 불렀다. 북한은 다음달 ‘핵무기 보유’를 선언하며 반발했다.

▦ 민주당 정권이던 빌 클린턴 정부에서는 ‘불량국가(rogue state)’란 말이 유행했다. 앤서니 레이크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1994년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스에서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기본가치를 훼손하는 국가”로 북한 쿠바 등 5개국을 지목하면서 불량국가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는 미국의 정치학자 해럴드 라스웰이 정치ㆍ군사 엘리트 체제라고 정의했던 ‘병영국가(garrison)’에 가장 근접한 국가로 북한을 꼽았다. 북한이 이런 멸시와 조롱에서 벗어날 날은 언제일까.

황유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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