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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 배지, 미스코리아 왕관...돌잡이 신풍속도

입력
2016.08.3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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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잡에 상에 올리기 위해 주문 제작된 금메달과 국회의원 배지, 장군성판(왼쪽부터).
돌잡에 상에 올리기 위해 주문 제작된 금메달과 국회의원 배지, 장군성판(왼쪽부터).
대통령을 상징하는 청와대 봉황문장(왼쪽)과 기업가를 의미하는 CEO 명패.
대통령을 상징하는 청와대 봉황문장(왼쪽)과 기업가를 의미하는 CEO 명패.
여권(외교관, 왼쪽)과 왕관(미스코리아).
여권(외교관, 왼쪽)과 왕관(미스코리아).
특정 브랜드의 외제차 모형을 돌잡이 상에 올리는 경우도 있다.
특정 브랜드의 외제차 모형을 돌잡이 상에 올리는 경우도 있다.

‘금메달을 잡아라!’ 간절한 외침은 올림픽 선수단이 아닌 돌잡이 상을 마주한 아이에게 향했다. 부모는 아이가 운동 선수로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돌잡이 상에 금메달을 올려놓았다. 돌잡이 결과대로 아이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부모 역시 이를 모를 리 없지만 돌잡이 상은 언제부턴가 각광받는 직업, 성공한 인물을 좇는 부모의 희망사항들로 채워지고 있다. 이미 의사봉(법조인)이나 청진기(의사)가 돌잡이의 필수 품목으로 자리 잡은 데 이어 CEO명패(기업가)와 장군성판(직업군인), 국회의원 배지, 청와대의 봉황문장(대통령)까지 부와 명예를 겨냥한 돌잡이 품목들이 날로 새롭게 창조된다. LA다저스 세트(메이저리거)처럼 구체적이거나 심지어 특정 브랜드의 외제승용차 모형까지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돌잡이 용품을 주문제작하는 ‘52밭 공방’ 이경희 대표는 “요즘엔 아예 쌀이나 실, 연필 등 전통적인 물건 대신 부모님이 바라는 특정 직업군을 표현한 물품만으로 돌잡이를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건강과 행복 기원하는

쌀ㆍ실ㆍ연필 등 전통적 돌잡이 대신

의사봉ㆍ청진기ㆍ장군성판 등

부와 명예 겨냥한 품목 늘어

최배영 성신여대 생활문화소비자학과 교수에 따르면 조선시대 돌잡이는 원래 아기가 중심이 되는 아기를 위한 의례다. 질병이나 사망의 위험에서 벗어나 첫돌에 이른 것을 축하하면서 아기의 건강과 행복 그리고 다재다능을 기원하는 것이 돌잡이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최 교수는 돌잡이가 아이를 위해서라기보다 부모의 소원풀이 이벤트로 변질되고 있는 현실을 지적했다. 그는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우선시돼야 할 것은 심신이 건강한 삶”이라며 “돌잡이를 준비하는 부모들은 아기의 전인적 성장을 지향한다는 교육적 책무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이에게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지를 우리 스스로 되묻는 의미에서 예사롭지 않은 21세기 돌잡이 풍경들을 모아보았다.

요즘 돌잡이 상에 단골로 오르는 청진기(의사, 왼쪽)와 의사봉(법조인).
요즘 돌잡이 상에 단골로 오르는 청진기(의사, 왼쪽)와 의사봉(법조인).

#1 부모 직업 이어받으라는 돌잡이 용품

실(장수)이나 붓(학자), 돈(재산) 등 기본 품목 외에 부모의 직업이나 가업에 따라 특이한 물건들이 돌잡이 상에 오른다. 의사 집안의 경우 청진기와 함께 칫솔(치과의사), 아기인형(산부인과), 안경(안과)을 준비하기도 하고 목축업을 하는 아빠는 돼지, 소, 병아리, 염소 모형을 올려 그중 하나를 집어 들기를 바란다. 이 대표는 “일식집을 운영하는 고객이 아이 돌잡이 상에 올릴 초밥 모형을 주문하거나 본적도 없는 크리켓 라켓을 주문한 크리켓 선수 아빠도 있었다”고 말했다.

#2 돌잡이 대신 신랑잡이도

여자 아이의 경우 돌잔치 때 ‘신랑잡이’를 하기도 한다. 개그맨 유재석이나 축구 선수 박지성, 배우 원빈 등 유명인의 인형을 놓고 미래의 신랑감을 고르는데 남편이 누구냐에 따라 여성의 미래가 결정된다는 믿음이 왠지 씁쓸하다. 돌잔치 전문 사회자 ‘옆집아저씨’는 “이때 반드시 아빠 인형도 함께 올리는데 대부분의 엄마들은 아빠를 고르면 싫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고 전했다.

#3 반칙 난무하는 돌잡이 판

부모가 원하는 품목을 집도록 애쓰는 과정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반칙도 난무한다. 변호사 조모(46ㆍ남)씨 부부는 둘째의 돌잡이 용구로 실, 연필, 돈, 의사봉과 함께 청진기를 준비했다. 가족들의 박수와 함께 돌잡이가 시작되자 부부는 아이 손의 움직임에 따라 상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청진기가 아이 손에 잘 닿게 하기 위해서다. 주저하는 아이의 손가락에 청진기가 걸리자 부인이 재빠르게 상을 내려놓았고 좌중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조씨의 큰형님은 아이 손에 들린 청진기를 보며 “우리 집안에 의사가 없었는데 드디어 나왔다”며 기뻐했다.

돌잡이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경우도 흔하다. 돌잔치 전문 사회자 ‘야무진엠씨’는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본인이 원하는 물건을 집지 않아도 박수를 치고 넘어가는데 가끔 아쉽다며 다시 하자는 분이 계실 경우 번외경기를 하곤 한다”고 말했다.

#4 돌잡이 때문에 불호령 떨어지기도

오토바이 동호회에 푹 빠진 신모(45ㆍ남)씨는 아들의 돌잡이 상에 멋진 미니어처 오토바이를 올려 놓았다. 얽매이지 말고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아빠의 바람과 엄마의 우려대로 아이는 오토바이를 덥석 집어 들었고 그와 동시에 행사장은 정적에 휩싸였다. 이를 지켜본 신씨의 부모가 “너만 타고 다니면 됐지 왜 위험한 걸 아이에게도 타게 하려 하느냐”며 노발대발했기 때문이다. 이후 돌잔치는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고 부인은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 시대 따라 인기 품목 달라져

성공의 기준이 시대에 따라 변하면서 돌잡이 물품 역시 유행을 탄다. IMF시대인 1990년대 말 국민들에게 힘과 용기를 준 박찬호, 박세리 선수 덕분에 야구공과 골프공이 돌잡이 상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 무렵 IT 벤처 열풍이 일면서 컴퓨터 마우스도 필수 돌잡이 물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마우스는 2000년대 중반 벤처 붐이 꺼지면서 자취를 감췄다가 최근 이공계의 인기에 힘입어 다시 등장하고 있다. 아이돌과 걸그룹 등 연예인이 대세로 떠오른 2000년대 중반부터 돌잡이 상에서 빠지지 않는 마이크와 더불어 청진기, 의사봉 역시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2000년대 말 등장한 박태환의 물안경과 김연아의 스케이트는 최근 들어 주춤하는 추세이고 셰프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요리사 모자나 국자, 주걱 등이 돌잡이 상에 오르고 있다.

박찬호 활약 땐 야구공

벤처 붐 일자 마우스

아이돌 열풍에 마이크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야구공(박찬호, 프로야구선수), 골프채와 공(박세리, 프로골프선수), 컴퓨터 마우스(IT벤처붐)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야구공(박찬호, 프로야구선수), 골프채와 공(박세리, 프로골프선수), 컴퓨터 마우스(IT벤처붐)
마이크(연예인) 역시 돌잡이 상의 단골 아이템이다.
마이크(연예인) 역시 돌잡이 상의 단골 아이템이다.
위 사진부터 시계방향으로 물안경(박태환, 수영선수)과 요리사 모자(셰프), 스케이트(김연아, 피겨스케이트선수).
위 사진부터 시계방향으로 물안경(박태환, 수영선수)과 요리사 모자(셰프), 스케이트(김연아, 피겨스케이트선수).

하객들에게 반 강제적으로 걷어 돌잡이 상에 올리던 ‘복돈’은 2000년대 후반 절정을 이루다 경제사정이 나빠지면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 사회자 ‘옆집아저씨’는 “과거 지방의 한 유지 집안 돌잔치에서 복돈으로 걷힌 돈뭉치들 때문에 다른 돌잡이 물건들이 묻혀 버린 적이 있을 정도로 복돈 걷기가 유행이었지만 요즘엔 아예 복돈을 걷지 말라고 당부하는 부모들이 더 많다”고 말했다. 그는 또 “돌잔치의 규모 역시 가족단위로 조촐하게 치르고 아낀 돈은 아이 이름으로 기부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라고 말했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류효진기자 jsknight@hankookilbo.com

권수진 인턴기자(한양대 철학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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