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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는 지금 '87년 한국 6월항쟁' 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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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는 지금 '87년 한국 6월항쟁' 정국

입력
2015.10.20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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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수도 앙카라의 한 광장에서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앙카라=AFP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수도 앙카라의 한 광장에서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앙카라=AFP

다음달 1일 조기총선을 앞둔 터키의 상황은 우리나라 민주화의 결정적 고비였던 1987년 ‘6월 항쟁’과 흡사하다. 당시 군인 출신 집권자들은 북한 발 안보위기와 경제발전 등을 정권연장을 위한 명분으로 삼아 집권연장을 꾀하고, 이에 반발하는 민주화 세력을 언론통제와 물리적 진압으로 압박했다. 터키도 비슷하다. 군인 출신은 아니지만 군부의 지지를 받고 있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쿠르드족 반군의 공격 위협과 산업화 성과를 내세우며 다가오는 조기총선 승리로 12년 장기집권 체제의 연장을 노리고 있다. 이를 위해 공안경찰을 동원해 민주화 시위를 벌이고 있는 언론인과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체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다음달 1일 열리는 조기총선은 터키 민주화의 향방을 결정할 역사적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터키 집권여당인 정의개발당(AKP)이 패배할 경우 에르도안 대통령의 퇴진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집권연장 의도를 대대적 저항으로 맞서 독재정권을 종식시켰던 우리나라의 민주화 과정을 터키 국민들은 지금 똑같이 밟아가고 있다. 다음달 1일 열릴 터키의 조기총선에 관심이 가는 이유다.

산업화 영웅 에르도안의 권력욕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한때 국가적 영웅으로 칭송됐다. 2003년 총리에 처음 취임한 직후 분리독립을 주장하던 쿠르드족 반군에 대한 포용정책을 통해 고질적인 안보불안을 해소했다. 또 노동시장 유연화와 공기업 민영화 등 적극적 시장주의 조치 등을 통해 터키의 연간 경제성장률을 약 9%까지 끌어올렸다. 미국 주도의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으로 서유럽과 동유럽의 전략적 가교 역할을 자처하면서 국제사회에서 외교적 발언권을 확보하는 등 몸값을 올려 터키를 중동의 신흥강자로 부상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의 권력욕이 터키의 장밋빛 미래를 조금씩 퇴색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내각책임제인 터키에서 12년 동안 총리를 연임하며 서서히 장기집권 체제를 구축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속해있는 집권여당인 정의개발당의 당헌이 총리의 4선 이상의 연임을 금지하자 지난해에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터키의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대통령중심제로 바꾸는 개헌을 통해 권력을 계속 유지하려 한 것이다. 대통령 임기도 7년 단임에서 5년 중임으로 바꿨다. 총리에 아흐메트 다부토글루가 취임했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평가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올해 6월 총선을 실시하는 것으로 장기집권 체제 구축에 들어갔다. 총선에서 정의개발당의 과반의석 확보를 달성해 대통령제 전환을 위한 헌법 개정의 의결 정족수를 채우는 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터키 국민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정의개발당은 6월 총선에서 약 40.8%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2011년 총선과 비교하면 득표율이 10% 포인트나 하락한 결과였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헌법 개정은 고사하고 이후 정권 유지를 위한 연정 구성조차 실패하면서 다음달 1일 조기총선을 치러야 하는 막다른 궁지에 몰렸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권력에 대한 탐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 이때부터였다. 외신들은 “에르도안 대통령이 오직 선거에서 승리를 위해 터키의 역사를 어두웠던 과거로 되감기 시작했다”며 “그의 권력욕 때문에 터키에는 지금 내전과 극우주의, 종교적 광신이 판치며 혼란과 분열이 거듭되고 있다”고 질타하고 있다.

쿠르드족 반군 근거지 폭격 시작

에르도안 대통령은 올 7월 중순 터키 쿠르드족 반군인 ‘쿠르드노동자당’(PKK)과 지난 3년간 진행해오던 평화협상에 대해 일방적으로 결렬을 선언했다. 쿠르드족 반군이 7월22일 터키 남동부의 산르우르파 주의 제일란프나르에서 경찰관 2명을 살해했다는 게 이유였다. 쿠르드노동자당은 해당 경찰 2명이 이틀 전인 7월20일 시리아 국경도시인 수르크에서 쿠르드족 30여명을 살해한 이슬람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의 조직원들이었다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터키 공군은 7월24일 쿠르드족 반군 근거지인 터키 남동부의 칸딜 산악지역에 대규모 공습을 시작했다.

이후 터키 정부군과 쿠르드 반군과의 전투가 가열되면서 내전으로 비화하고 있다. 터키 남동부 도시인 디야바키르의 굴탄 키사낙(54) 시장은 “3, 4분마다 전투기들이 상공을 가로질러 칸딜 산맥으로 날아가는 굉음을 들을 수 있다”고 말했다. 시리아와 이라크 중간에 있는 터키 국경도시인 지즈레에는 지난달 통행금지 조치가 내려져 쿠르드족 거주민 약 11만3,000명이 사실상 감금됐다. 터키 정부는 최근 “지금까지 약 2,000명의 쿠르드족 반군을 사살했다”고 밝혔다. 1980년대 터키 정부군과 쿠르드족 반군의 교전으로 양측에서 약 4만명이 사망했던 당시 내전상황이 반복될 것이라는 우려가 점차 커지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쿠르드족에 대한 포용정책을 펼쳤던 첫 정치인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005년 8월 쿠르드족 반군을 억압했던 정부의 과오를 처음으로 사과했다. 쿠르드족이 모여있는 터키 남동부 지역의 기간시설에 수십억유로를 투자하는 것은 물론 그간 금지돼있던 쿠르드족 언어교육과 언론활동 등도 허용했다.

그가 올해 7월 이후로 갑자기 태도를 돌변한 이유는 조기총선의 압도적 승리를 위해서다, 쿠르드족 반군과의 갈등은 에르도안 대통령이 보수층의 결집을 유도하는 데도 유리하다. 과거 쿠르드족 반군과 벌였던 내전의 상처를 들쑤시며 안보 불안을 자극할수록 보수층의 표심은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쏠리기 때문이다. 지난 10일 터키 수도 앙카라에서 벌어진 폭탄테러로 128명이 사망하는 참사를 정부가 방조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러한 이유다.

더욱이 쿠르드족을 대변하는 인민민주당(HDP)은 올해 6월 총선에서 약 13%의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에르도안 대통령의 정의개발당 의석을 잠식했다. 다음달 열리는 조기총선에서 안정적으로 승리하려면 쿠르드족 반군에 대한 비난 여론을 고조시켜 인민민주당을 의회 밖으로 내쫓아야 한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7월20일 쿠르드족 반군에게 살해당한 경찰 2명을 ‘순교자’로 칭하며 대규모 장례식을 거행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8월초 터키 동북도 도시인 트라브존의 케이케라에서 열린 경찰 두 명의 순교자 장례식 연설을 통해 “이들의 가족과 친척, 친구가 된다는 것은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냐”면서 “이러한 순교자들은 천국에서 이슬람 예언자 무함마드의 옆자리에 앉아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독일 주간 슈피겔은 “시민들이 에르도안 대통령의 연설을 비판하면 ‘모욕죄’ 혐의로 체포된다”면서 “사복을 입은 공안경찰들이 돌아다니며 반정부 성향을 띤 언론인을 체포하고 시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2013년 5월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진 15세 소년의 장례식에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 애도하고 있다. 이스탄불=AFP
2013년 5월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숨진 15세 소년의 장례식에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 애도하고 있다. 이스탄불=AFP

터키 조기총선 전망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선전 선동에도 에르도안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민주화 세력의 시위는 점차 거세지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스탄불 도심에 위치한 탁심광장의 게지공원이 있다. 2013년 공원 재개발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발생했던 곳이다. 시민단체들은 게지공원 근처에 텐트를 치고 노숙을 하며 매일 반정부 집회를 이어갔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군경을 동원해 텐트를 불태우고 최루탄 가스를 발사하는 등 폭력으로 유혈 진압하자 전국적으로 비판 여론이 들끓었고 터키 민주화 시위의 불을 댕기는 진원지가 됐다.

슈피겔은 “게지공원은 에르도안의 시대의 교체를 요구하는 상징하는 장소”라고 평가했다. 시민활동가인 고칸 비치치(36)는 “게지 시위가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며 “시민들은 게지 시위에 대한 언론보도를 보며 터키언론이 집권여당의 나팔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현재 민주화 시위를 지지하는 트위터 팔로워 숫자는 180만명에서 900만명으로 약 5배나 증가했다.

쿠르드족 반군도 에르도안의 정치적 술수를 간파한 상태다. 쿠르드노동자당은 정부군과의 격렬한 교전상황에도 불구하고 최근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면 평화협상에 복귀할 수 있다는 뜻을 밝히며 에르도안 대통령을 압박하고 있다. 세 가지 조건은 ▦정부군의 즉각적인 공습 중지 ▦2013년 수감된 쿠르드노동자당 대표 압둘라 오칼란의 석방 ▦제3자의 중재를 전제로 한 평화협상 협의다. 하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은 “쿠르드족 반군이 조건 없이 백기 투항해야 한다”며 공세를 멈추지 않고 있다.

외신들은 다음달 1일 열리는 조기총선을 앞두고 에르도안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가 거세지면서 그가 선거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크다고 점치고 있다. 총선에서 정의개발당이 패배하면 민주화 세력의 지지를 받는 제1야당인 공화인민당(CHP) 등을 중심으로 새 총리가 선출될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가 민주화 항쟁 이후 대통령 직선제를 통해 첫 민주정부를 출범시켰던 것처럼 터키 국민들에게는 이번 조기총선 결과가 그 역사적 전환점이다.

다만 에르도안 대통령의 리더십 아래 터키의 빠른 경제성장의 결실을 경험한 산업화 세대들은 여전히 확고한 지지를 보내고 있어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들은 에르도안 대통령의 장기집권은 고도성장을 이뤄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역사적 선택이었다고 주장한다. 터키 카이세리에 사는 마흐무트 히클리마즈(58)는 “게지 시위로 불안이 확산되면서 기업들이 문을 닫고 관광객들이 떠났다”면서 “터키를 사랑한다는 사람들이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반기를 드는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고 비판했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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