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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에서 아빠가 들려준 여왕 이야기

입력
2015.07.17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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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딸이 여행을 간다. 엄마와 동생들은 빼놓고 단둘이 떠나는 여름휴가다. 젖먹이를 안은 엄마가 창가에서 손을 흔든다. 키 순서대로 조로록 창가에 서 있는 그림자 셋은 따라가지 못해 심통 난 동생들이다. 일곱 식구 복작대는 집을 벗어나 호젓한 바닷가 휴양지에 닿았다. 낮에는 수영을 하거나 뗏목 위에 나란히 누워 드넓은 하늘과 바다를 만끽하고, 밤에는 아빠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잠드는 유유자적 달콤한 일주일. 그 일주일 동안 아라비안나이트의 세헤라자데처럼 아빠가 밤마다 딸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바로 ‘여왕 기젤라’다.

기젤라라는 소녀가 배를 타고 세계 여행을 떠났다가 폭풍에 휘말린다. 다행히 외딴 섬에 닿아 목숨을 구하는데 그곳은 놀랍게도 사람 말을 하는 미어캣들이 사는 섬이다. 오밀조밀 볼거리 많은 능청스런 그림과 함께 흥미진진하게 시작된 이야기, 그러나 이야기는 뜻밖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친절한 미어캣들이 불청객을 너그러이 환대하자, 불청객이 얼토당토않게 정복자 행세를 시작한 것. 기젤라는 미어캣들을 종처럼 부리고, 여왕이 되겠다며 대관식을 요구하고, 심지어 미어캣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바치란다. 그야말로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이다.

니콜라우스 하이델바흐 글·그림, 김경연 옮김 풀빛ㆍ32쪽ㆍ1만1,000원
니콜라우스 하이델바흐 글·그림, 김경연 옮김 풀빛ㆍ32쪽ㆍ1만1,000원

사악함에는 응당 천벌이 뒤따르니 미어캣들이 작고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다. 이들의 봉기는 빠르고 은밀하며 완벽하다. 화려한 깃털 왕관을 쓰고 뗏목에 묶여 바다로 떠내려가는 기젤라, 소원대로 여왕이 된 기젤라, 영원히 바다를 떠도는 저주받은 바다의 여왕. 철저한 징치(懲治)로 끝나는 이 이야기에는 오랜 세월 사람들의 마음속에 깃들어 삶을 일깨워온 메르헨의 피가 흐른다. 인간의 오만에 대한 경계와 함께 지리상의 발견과 더불어 유럽이 써내려간 피의 역사, 제국주의와 식민지 수탈의 역사에 대한 반성도 담겨 있다. 곱씹을수록 여운이 깊다.

마지막 날 한밤중에 잠이 깬 아이는 바다를 본다. 뗏목에 묶인 기젤라가 아이에게 손을 들어 보인다. 자신을 잊지 말라는 듯이. 참으로 의미심장한 두 겹의 이야기에 이젠 어른이 되었을 딸이 마침표를 찍는다. “정말 멋진 여행이었습니다.” 글도 그림도 더할 나위 없다.

여름방학이다. 올 여름에는 다들 멋진 여행하시기를.

최정선ㆍ어린이책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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