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박소영 기자

등록 : 2016.07.13 17:44
수정 : 2016.07.14 09:42

서른살 회사원, 포켓몬 잡으러 속초 간 사연

등록 : 2016.07.13 17:44
수정 : 2016.07.14 09:42

회사원 김모(30)는 13일 회사에 휴가원을 제출했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댔지만 실제로는 ‘포켓몬 고’ 게임을 하기 위해 속초로 가기로 한 것.

김씨는 어린 시절 또래 아이들처럼 포켓몬스터 애니메이션의 열혈 시청자로, 포켓몬 빵을 사먹으며 그 안에 들어있는 ‘띠부띠부씰’ 스티커를 수집했었다.

그는 “며칠 전 호주에 사는 사촌이 포켓몬 고 게임을 하는 걸 인터넷으로 보여줬는데 신세계였다”며 “한국에선 포켓몬 고를 할 수 없어서 실망했는데 속초 인근에선 실행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로 출발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김씨처럼 당장 떠나지는 않더라도 주말에 속초로 가려는 사람도 많다. 마침 휴가철과 겹쳐 속초행 주말 버스 예약이 매진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지난 주 미국, 호주, 뉴질랜드에서 출시된 이 게임은 아직 한국 등 아시아지역에서는 서비스하고 있지 않지만, 신기하게도 속초에서는 포켓몬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포켓몬 고’ 열풍에 신난 속초시

속초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 유저는 포켓몬 고를 하는 장면을 트위터에 올렸다. 트위터 캡쳐

포켓몬 고는 닌텐도의 포켓몬 캐릭터를 AR 기술과 결합해 만든 게임이다. 만화에서처럼 현실 속에서 포켓몬을 잡기도 하고 체육관에서 대결을 벌일 수도 있다. 다만 먼저 출시된 3개국을 제외한 국가에서는 아직 게임이 출시되지 않아, 해당 국가에서는 해외 계정을 만들거나(아이폰) 보안 위험을 감수하고 APK 파일을 직접 다운 받아(안드로이드 폰) 게임을 하는 등의 편법을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이처럼 APK 파일을 받아 설치하더라도 앱을 실행시켰을 때 포켓몬이 돌아다니지 않으면 잡을 수가 없다. 한국 역시 일본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지역에서 포켓몬을 잡을 수 없게 돼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속초 지역에서 포켓몬 고 서비스가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 12일 오후부터 각종 게임 관련 커뮤니티에는 속초에서 포켓몬을 잡을 수 있다는 글이 속속 올라오기 시작했다. 해외 지도 반출 규제와 관련한 한국 정부와 구글과의 마찰 때문에( 기사보기 ) 해외처럼 동네 구석구석 상세지도 서비스는 제공되지 않지만, 허허벌판처럼 표시되는 화면 속에 몬스터가 나타나고 잡을 수는 있다는 것. 13일에는 속초뿐만 아니라 고성, 울릉도 등에서도 포켓몬 고가 가능한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은 물론 포켓몬의 종주국 일본에서조차 잡을 수 없는 포켓몬이 속초에서 잡힌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게이머들은 흥분했다. 온라인 게임 커뮤니티 인벤은 속초로 가 포켓몬 고를 하는 영상과 기사 등을 실시간으로 올리기도 했다.

마침 휴가철을 맞은 속초시도 뜻하지 않은 포켓몬 고 열풍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트위터, 페이스북, 블로그 등 속초시 공식 소셜미디어 사이트는 무료 와이파이존이 표시된 지도를 공개했고, 이병선 속초 시장은 허핑턴포스트코리아와의 인터뷰 에서 “우리 속초는 대한민국 최고의 관광도시인 데다가 어제(12일) 동서고속철도 사업 선정이 확정된 터라 저로서도 환상적인 상황”이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속초에서 포켓몬 고가 가능하다는 소식을 재치있게 알린 속초시의 공식 트위터 계정. 트위터 캡쳐

속초에서만 포켓몬을 잡을 수 있는 이유

포켓몬 고의 제작사 나이앤틱의 전작인 AR 게임 인그레스의 세계 지도에서 한국 지역의 셀 기호를 찾아 이어 붙인 이미지. 출처: 김용욱 페이스북 페이지 http://bit.ly/29Oe8YV

그럼 왜 속초에서만 포켓몬을 잡을 수 있는 걸까. 이는 포켓몬 고의 개발사인 나이앤틱이 임의로 분류한 지역 구분에서, 속초 부근이 아시아가 아닌 북부 지역에 포함돼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나이앤틱은 역시 AR 기술을 사용한 게임 ‘인그레스’에서 전세계 지도를 마름모꼴 모양 ‘셀’로 세분화했는데, 이 셀들이 모이면 크게 6가지 지역(북부(NR), 아메리카(AM), 아프리카(AF), 아시아(AS), 태평양(PA))을 이룬다. 그런데 북부(NR)와 아시아(AS)의 경계가 한국을 가로지르고 있기 때문에, 한국 대부분 지역은 아시아 지역에 속해 있지만 북한과 속초 부근은 유럽, 캐나다, 러시아, 몽고 등이 속한 북부 지역에 속해 있다. 속초 부근의 셀 기호는 ‘NR15-ALPHA’이다.

인그레스 게임의 지역 구분. 한국은 아시아(AS)와 북부(NR)지역에 걸쳐 있다. 출처: 인그레스 레지스탕스 코리아 네이버 카페 http://cafe.naver.com/ingressresistance/1663

실제로 현재 각국의 포켓몬 고 실행 현황을 보면, 정식 출시한 3개국 외에도 영국과 독일, 노르웨이, 스페인, 포르투갈 등 일부 유럽 국가, 이집트, 러시아 등지에서는 포켓몬을 잡을 수 있는 반면 일본, 싱가포르,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국가와 브라질 등 남미에서는 포켓몬을 잡을 수 없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즉 북부(NR) 지역에서는 대부분 서비스가 되고 있는 것. 앞으로 포켓몬 고가 일본 등 아시아(AS) 지역에서 서비스되면 속초를 제외한 국내 지역에서도 포켓몬을 잡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국내에서는 상세 지도 없이 허허벌판에서 포켓몬을 잡아야 한다. 동네 구석구석 도로와 주요 관공서, 공원 등이 표시돼 있는 해외에 비해 포켓몬을 잡으러 가기가 좀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속초(왼쪽)에서 포켓몬을 찾으려면 도로 표시가 안 돼 있어 헤매야 한다. 해외에서는 구글 지도를 통해 상세 지도가 표시된다. 출처: 인벤, 포켓몬 고 홍보자료

콘텐츠와 AR의 결합이 성공 요소

포켓몬스터와 관련된 애니메이션이나 기존 닌텐도 게임을 접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당장 속초로 떠나겠다는 김씨나 세계를 휩쓰는 ‘포켓몬 고’ 열풍을 의아해하기도 한다. AR이라는 기술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이를 활용한 나이앤틱의 전작인 ‘인그레스’는 지금과 같은 폭발적인 반응은 없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무려 20년이 넘도록 인기를 이어 온 ‘포켓몬’이라는 콘텐츠와 AR의 성공적인 결합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고 분석하고 있다.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의 인기가 높아지자 1998년 샤니에서 생산된 포켓몬 빵도 높은 인기를 누렸다. 특히 빵 포장지 안에 든 ‘띠부띠부씰’은 151종을 모두 모으는 소비자들이 있을 정도였다. 위키백과

일본에서 포켓몬스터는 20년 전인 1996년 게임으로 처음 출시돼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는 한국에서는 1999년, 미국에서는 1998년부터 TV를 통해 방송됐다. 포켓몬스터는 게임과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매체로 활용되지만, 포켓몬 트레이너가 몬스터 볼로 몬스터를 포획한 다음 데리고 다니며 키운다는 공통적인 줄거리가 있다. 무려 151종의 몬스터가 진화를 통해 성장하여 총 720종에 달하게 된다.

포켓몬스터 첫 방영 이후 17년이 지난 지금 당시 띠부띠부씰을 모으던 어린이들은 20대 중반~30대 초반의 성인이 됐고, 새로운 기술의 도입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세대다. 이들이 AR과 어린시절 열광하던 콘텐츠가 결합된 ‘포켓몬 고’에 열광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또 하나 주목할만한 점은 포켓몬 고가 실생활에 녹아든 AR의 모습을 본격적으로 보여줬다는 것이다. 지난해 등장한 가상현실(VR) 기기처럼 끊임없이 VR, AR이 활용된 상품이 출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 인터넷 매체 복스 는 포켓몬 고가 “실제 삶의 대체재로서 가상현실을 즐길 수 있기까지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임을 보여줬다”며 팍팍한 현실을 도피하고자 가상현실의 콘솔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미래가 멀지 않았다고 전망했다.

11일 미국 뉴욕의 유니온 스퀘어에서 사람들이 모여 포켓몬 고를 하고 있는 모습. 뉴욕=EPA 연합뉴스

포켓몬 고가 출시된 미국과 호주, 뉴질랜드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길거리에 모여 포켓몬 고를 하는 모습이 목격되고 있다. 이들은 “포켓몬 고 때문에 처음 본 사람들끼리도 함께 웃고 떠들며 즐겁게 게임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오는 주말 속초에도 한국의 포켓몬 트레이너들이 띠부띠부씰이 아닌 진짜 몬스터를 잡으러 갈 예정이다.

박소영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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