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박선영 기자

등록 : 2017.08.12 04:40

[블라인드 채용] “학벌 좋은 사람이 일 잘할 확률은 20% 미만”

학력과 실력의 상관관계

등록 : 2017.08.12 04:40

갭점퍼스, 1400회 치러진

블라인드 오디션 분석해보니

명문대 백인 1차 통과자

오디션 후 절반으로 ‘뚝’

여성ㆍ전문대 비율은 급증

해외선 IT기업들 블라인드 채용

학력이 좋으면 실력도 좋을 것이라는 사회적 통념은 과학적으로 게으른 추론임이 판명됐다. 한국사회에서 취업의 '패스트 패스'를 쥔 것으로 평가 받는 서울대(왼쪽부터), 연세대, 고려대 캠퍼스 정문. 한국일보 자료사진 및 각 학교 홈페이지

“학벌 좋은 사람이 입사 후 일을 잘할 확률은 20% 미만이라고 봅니다. 인사 담당자들끼리 모여 얘기해 보면 학력과 실력 사이에는 거의 상관관계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죠.” 인사 담당 책임자 A씨가 근무하는 회사는 과거 신입사원을 뽑을 때 서울대는 10점, 연세대와 고려대는 9점 식으로 출신 대학에 따라 차등 점수를 부여했다.

좋은 학교를 나왔다는 건 지능과 학습능력이 뛰어나다는 뜻이므로 일도 잘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학력을 실력의 대리지표로 활용해 온 것이다. 하지만 A씨의 회사가 신입사원들의 3년 후 직무성과와 출신학교 간 상관관계를 자체 분석해 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좋은 대학 나왔다고 무조건 일 잘하는 건 아니라는 게 결론이었죠. 물론 몇몇 개인만 놓고 보면 학력과 실력이 일치하는 경우가 제법 있어요. 경영진이 ‘그래도 스카이(SKY)지’ 하며 좋은 대학 출신에 대한 애정을 못 버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죠.”

경영진을 설득해 최근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한 A씨는 “절차가 번거롭고 빡빡해져 오히려 스카이 출신들이 지원을 안 할까 봐 걱정이 크다”며 “몇몇 기업들은 실무 단계에서 블라인드 채용을 추진하기로 했다가 경영진의 최종 의사결정 단계에서 일단 보류한 걸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채용시 구직자의 정보를 어디까지 블라인드 처리할 것이냐의 논란에서 가장 찬반이 분분한 것은 학력이다. 학력이 실력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연성은 충분하고, 학업에서든 직무에서든 학습능력은 성취도의 중요한 요소인 것도 사실이다. 학력 스펙이 좋은 구직자들이 역차별 운운하며 블라인드 채용에 반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굳건한 통념에도 불구하고 학력과 실력의 상관관계는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못했다. 이 분야의 기념비적 연구로 꼽히는 프랭크 슈미트 아이오와대 교수와 존 헌터 미시간주립대 교수의 1998년 논문 ‘인사심리학의 선발방식에 따른 타당성과 유용성’에 따르면, 전형 방법에 따른 구직자의 실력 예측변수를 -1에서 1까지 놓고 볼 때 학력(교육기간)의 상관관계는 0.1에 불과했다. 명문대 출신 여부를 구체적으로 분석한 결과가 아니라는 한계는 있지만, 고등교육을 받았다고 일을 잘한다는 보장은 없다는 뜻이다. 0.5 이상이면 강한 상관관계가 있고, 0.2 이하는 약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뜻하며, 0은 상관관계가 없고, 마이너스는 역의 상관관계를 나타낸다.

85년간의 연구 결과를 종합해 피고용자 3만2,000명을 대상으로 메타 분석한 이 논문에서 구직자의 실력을 예측할 수 있는 가장 타당한 전형 요소는 채용 후 부과할 작업의 일부를 시켜보는 작업 테스트(0.54)였다. 실제 할 일을 맡겨보는 것이 실력을 확인하는 가장 유효한 방법이라는 당연한 결론이다. 하지만 직무분석이 제대로 돼 있지 않고 채용 후 어떤 일을 시킬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규모 공채로 인력을 충원해 온 한국 대기업의 관행과는 거리가 멀다. 한국 기업들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학력을 채용 잣대로 쓰는 이유다.

학력의 대안으로 제시된 경력도 실력을 예측할 수 있는 적합한 요소가 되지 못했다. 경력 연차와 실력의 상관성은 0.18로, 경력이 길다고 실력이 있는 것은 아님을 보여 준다. 직무 입문 단계인 0~2년 차에는 경력에 따른 실력 차가 유의미하지만 그 이상이 되면 결국 잘하는 사람이 잘하는 것이다. 반면 IQ와 같은 지능테스트가 0.51, 직무분석에 근거한 구조화된 직무면접이 0.51, 정직성과 성실성이 각각 0.41과 0.31로 실력의 유효한 예측변수였다.

학력과 실력의 낮은 상관관계를 절감한 세계의 많은 기업들이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학력과 실력 사이의 낮은 상관관계를 절감하고 과감히 블라인드 채용을 도입한 기업들은 주로 실리콘밸리의 신기술 기업들이다. 주요 IT 기업의 인적 구성은 최고 엘리트 대학을 나온 백인 남성 일색으로 지나치게 획일적이었는데, 감(感) 대신 데이터 분석을 통해 학력이 실력과 일치하지 않음을 깨닫고 민첩하게 채용 방식을 변경한 것이다. 스탠포드대 출신인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공동 창업한 구글은 획일적 엘리트주의라는 비판에 “충분한 여성 및 소수인종 지원자가 없고, 실력 있는 사람들을 뽑다 보니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두 창업자가 지원자들의 미 대학수학능력시험(SAT) 점수와 대학 학점까지 뜯어보며 자신과 비슷한 학벌의 사람들만 뽑는다는 지적이 많았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도 마찬가지다.

IT업계의 이 같은 채용 차별에 맞서기 위해 실리콘밸리 소수인종 출신 기업가 3인이 뭉쳐 만든 기업도 있다. 2014년 설립된 블라인드 오디션 소프트웨어 플랫폼 ‘갭점퍼스(GapJumpers)’다. 수많은 IT 인재들이 학벌 때문에 사장되는 것이 심각한 문제라는 인식 아래 실력을 제외한 인적 정보를 알 수 없게 한 블라인드 채용 시스템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 지원자는 이름, 성별, 나이, 출신학교, 졸업 연도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배경을 짐작할 수 있는 주소도 쓸 수 없으며, 익명으로 해당 업무에 기반한 도전들을 해결함으로써 실력과 자격을 갖췄음을 입증하면 된다. 구직자에겐 공짜이고, 기업들에는 5,000~4만달러를 받는다.

갭점퍼스가 블룸버그, 돌비연구소, 모질라 등의 요청으로 진행한 1,400회의 블라인드 오디션을 분석한 결과, 과거 1차 전형 통과자의 80%가 명문대를 졸업한 신체 건강한 백인이었지만 블라인드 오디션 이후 40%로 급락했다. 결국 면접 등 어느 단계에 이르면 지원자의 정보를 알게 되지만, 블라인드의 기간이 길면 길수록 보다 공정한 채용의 결과가 나왔다. 케다르 아이어 등 갭점퍼스 개발자들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 소프트웨어 덕분으로 기업들이 편견 때문에 놓쳤을 뻔한 최고의 재능을 가진 가장 다양한 인적 구성을 갖출 수 있게 됐다”며 “첫 인상을 좌우하는 것이 이력서가 아니라 실력이기 때문에 면접의 초점도 거기에 맞춰지고 덕분에 면접관과 지원자 모두에게 심층면접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갭점퍼스를 통한 입사지원자 성별은 여성이 54%, 남성은 46%였지만, 1단계 블라인드 오디션 후 면접에 진출한 비율은 여성이 58%로 더 높았고, 최종 합격한 비율은 68%로 남성 32%를 압도했다. 면접에 진출한 커뮤니티 칼리지(전문대학) 졸업생 비율은 전통적 전형보다 15% 증가했다.

구글은 2014년 처음으로 회사의 인구학적 구성을 공표한 이래 복잡한 문제 해결력을 평가하는 형식으로 채용 방식을 바꾸었다. 지원자 1인당 6개월에 걸쳐 총 25회의 인터뷰를 보는 복잡다단한 전형을 실시하고 있다. 젊고 민첩한 문화의 신기술 기업들이 먼저 깃발을 올린 블라인드 채용은 로펌, 회계법인, 컨설팅 회사 등 인문계 성삼위일체 기업들에도 급속히 확산되는 중이다. 실력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는 기업마다 다르다. 실력을 규정할 수 있는 요소들과 그것을 평가할 수 있는 공정하고 유용한 시스템에 대해 한국기업들도 치열하게 고민할 때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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